인문학으로 명화 읽기

형식미학으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 읽기

박연실 2016. 5. 25. 23:20

먼저 인상주의 작품으로 형식미학을 읽어볼까요?

많이 본 그림이죠? 마네가 그린 <부채를 든 여인> 입니다.

고전주의 회화에 익숙한 분이라면 이 그림은 좀 완성도가 떨어지고, 그래서 첫 눈에 잘 그리지 못한 그림으로 판단할 수 있죠.

 

 

에드와르 마네, <부채를 든 여인>

 

그러면 이런 작품은 어떤가요?

 

 

카롤라스 듀랑, <모델 랑시>, 1876

 

인물의 피부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처럼 텍스쳐가 곱고, 그녀가 입은 비단 드레스는 반짝반짝 윤이 나지요? 그녀의 몸매는 여신처럼 황금 비율이 적용되어 여성이면 닮고 싶은 롤 모델로 볼 수 있네요. 고전주의 회화는 이렇게 본질적이고 특징적인, 그리고 감탄할만한 탁월한 이상을 목표로 하였지요.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택과 집중'이란 항목에 강조를 한 것에 근원을 두고, 최고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 설정하였었답니다.

 

그러나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특히 클라이브 벨이나 로져 프라이, 클레먼트 그린버그 같은 미학자들은 칸트의 '합목적 형식'에 주목하면서, 주체의 무관심성이란 관조상태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형식의 본성과 순수성에 집중을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합니다. 그리하여 2차원 회화가 왜 3차원의 조각이나 건축의 공간에서처럼 모델링과 원근감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매체의 속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2차원 회화에서는 입체적인 모델링이 아니라 '평면성'으로 선과 색채의 관계와 결합을 되뇌이면서 '의미있는 형식'으로 나아갑니다.

마네가 그린 <부채를 든 여인>은 조각같은 피부도 황금비율도, 또 비단같이 빛나는 윤기도 없습니다. 오히려 붓질의 거치름과 물감의 임파스토가 켄바스 전체에 난무하지요. 그런 속성이 회화가 가지는 물감과 붓의 속성이고, 켄바스라는 재료가 본래 2차원 평면이니 그것을 위장할 필요가 없는 눈속임(tromp l'oeil)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점이 회화의 정체성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형식미학으로 마네의 작품들을 다시 보면, 이전보다 훨씬 친근한 작품으로 보일 것입니다. 

 

 

              

에드와르 마네, <올랭피아>                                                                                알렉산더 카바날, <비너스의 탄생>

 

 

                                    

에드와르 마네, <풀밭위의 점심>                                                                                               마네, <피리부는 소년>

 

 

다음 작가의 작품을 볼까요?

 

 

조르쥬 쇠라, <그랑자뜨 섬의 일요일 오후, 1886>

 

점묘파로 알려진 조르쥬 쇠라의 작품이죠.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가정 주부, 부르쥬아로 보이는 백인 남성, 요조 숙녀, 또는 직업 여성들이 일요일 오후에 강가에 모여 낚시도 하고, 친구들과 담소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장면입니다.

형식주의 미학으로 보면 우선 형식의 한 요소로 보는 점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이 눈에 띕니다. 점이 모이면 선이 됨으로 형태의 윤곽선은 점의 궤적으로 표현하였군요.

그런 형태 안에 색상의 표현도 점으로 칠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젠가 언급한 대로, 그림을 그릴 때 점으로 시작해서 완성해 가는 과정은 실패할 확률이 많이 줄어듭니다. 점은 조형의 최소 단위이니까 아주 작아서 그렇지요.

쇠라를 포함한 피사로, 그리고 시냑의 회화를 점묘주의(Pointalism), 혹은 점묘파, 분할주의(Divisionnisme)라고 부릅니다.

<그랑자뜨 섬의 일요일 오후>에는 고전주의 회화에서 보았던 조각같은 입체감이나 공간감이 많이 사라져 보입니다.

2차원 회화의 평면이 3차원 같은 건축학적 공간감의 표현을 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지요.

회화는 회화로서의 자율성을 강조한 것이랍니다.

 

다음 작품을 볼까요?

 

 이 작품은 헨리 마티스의 <사치, 고요, 관능, 1904> 입니다.

 

 

 

방금 보았던 점묘파 화가들의 작품과 유사하죠?  마티스는 후기 인상주의, 혹은 야수파로 분류되는데, 그 역시 당시 색채학이란 새로운 학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죠. 인상주의 외광파 예술가들처럼, 물감을 파렛트에서 섞어 발라내는 것이 아니라 튜브에서 직접 짜 붓으로 텃치하듯이 칠하면서 우리의 망막이 그것을 혼합해서 보도록 의도하였답니다. 그래서 가령 주황색을 칠하고 싶으면 빨강과 노랑을 나란히 칠하여 우리의 눈이 그것을 주황으로 보도록 하는 식이지요.

한편 마티스는 야수파 답게 벌거벗은 여인들이 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말리면서 디저트를 즐기는 아주 원시적인 즐거움을 화폭에 표현하였네요.

주변은 뜨거운 햇살이 난무하듯이 무더운 가운데, 시원한 강바람이 목욕한 여인들의 몸을 말려줄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지죠.

그림의 색상은 빨강, 노랑, 파랑이란 물감의 삼원색이 강렬한 빛을 동반하여 원색의 즐거움이 느껴지죠.

 

이후 형식미학으로 더 해석할 수 있는 현대 회화가 있죠. 마티스의 <붉은 실내,  >입니다.

 

 

헨리 마티스, <붉은 실내, 1908>

 

아라베스크 문양이 있는 식탁과 벽지는 마치 빨간 모포로 붙인 것 같은 연결선상에 있네요. 식탁 옆에는 반 고흐의 방에서 보았던 서섹스 의자가 있고, 초록색의 창밖의 풍경은 차라리 액자의 그림처럼 표현이 되어 있어요. 형식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림은 색채가 하나의 형식요소로 볼 수 있겠네요. 서있는 여인은 앞치마를 두른채 아마 안주인의 하녀쯤 되보이는데, 디저트용 과일그릇을 닦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전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입체감이나 원근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자태는 마치 색종이를 오려놓은 것 마냥 평면적이고 납작한 형상입니다. 2차원 회화에 3차원의 가치를 담을 필요로 못 느낀 마티스는 2차원의 정체성을 평면성으로 표현하였고, 그런 회화의 자율성을 색이란 형식요소로 야수파 답게 표현하였습니다

 

다음 작품을 보죠.

 

 

빈센트 반 고흐, <붓꽃, 1889>, 71x 93cm, 게티미술관

 

 

이 작품은 반 고흐 작품이죠?  전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의 형식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래요. 점 보다는 선이 많이 보이네요.

쭉쭉 뻗은 붓꽃의 줄기와 잎파리들이 고흐 특유의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현되었네요. 붓꽃은 보라색이 많은데, 고흐는 푸른색으로 표현했어요.

서양에서 푸른색은, 동양에서 독야청청이나 청출어람에서 처럼 긍정적인 색인데 비하여 우울이나 슬픔을 나타내죠. 우리는 당시 고흐의 심정을 이 파란색을 통해서 읽을 수 있죠.

<붓꽃>에서의 형식 요소를 고흐는 선과 색, 그리고 형태를 통하여 표현하였으며, 우리는 고흐가 표현한 붓꽃의 독창성을 알게 되는군요.

 

 

빈센트 반 고흐, <생 레미산, 1889>

 

위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윤곽선이 많이 강조되어 있죠? 가장 명도가 낮은 검은 무채색으로 형태에서 아웃라인을 그렸네요.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는 형태를 특히 강조하고 색은 그 형태를 설명하기 위한 조형 수단이었는데,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에서는 형태보다는 오히려 색이 위주가 되어 그림을 그려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물감의 가촉성이 느껴져요. 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리다가 망치기라도 하면 물감을 덕지덕지 도화지 위에 뭉게놓은 것처럼 말이죠.

그린버그는 오히려 그러한 점이 회화의 자율성으로 규정합니다. 회화니까 그런 물감이란 재료의 속성으로 켄바스 위에 뭉개어 발라도 그 정체성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지요. 고전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그림이지만 시대가 지나 형식미학의 입장으로 바라본 후기 인상주의 작품에선 아무런 문제제기가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헨리 마티스, <마담 마티스, 초록 여인, 1905>

 

다시 마티스 작품으로 돌아가 볼까요? 마티스가 자기의 아내를 그린 그림입니다. 전통적인 초상화의 입장에서 보면 많이 낯선 그림입니다.

이 그림도 색을 연구하는 색채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만 처음 보면 웬지 자연스럽지 않은 듯 합니다.

마담의 코 라인을 따라 위 아래가 녹색으로 칠해져 있지요? 색채학에서 녹색은 모든 색 가운데 중간의 온도색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빨강색 계열은 따뜻해서 온도가 높고, 파랑색 계열은 차가와서 온도가 낮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온도가 높다는 것은 밝은(고) 명도와 관련되고, 온도가 낮다는 것은 어두운(저) 명도와 관련시킵니다.

그러나까 그림상에서 코라인을 따라 오른쪽은 저명도에 가깝고, 그 반대편은 분홍색이 칠해져 있어서 고명도, 즉 밝은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담의 왼쪽에서 빛이 들어왔다는 색의 논리로 명암을 표현한 것입니다.

만일 마티스가 녹색이 아닌 파란색 계열로 표현하였다면 많이 어두운 명암을 의도하였다고 볼 수 있겠죠.

이렇게 전통 회화에서는 검고 흰 무채색 계열로 명암을 표현하는 데 비해서 후기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색온도로 명암을 표현하여  색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