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명화 읽기

신고전주의 작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 읽기

박연실 2016. 4. 30. 18:09

신고전주의 예술은 1745년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프랑스 미술계의 지배적 양식이었으며, 계몽주의의 논리인 이성중심의 세계를 반영한다.

신고전주의 대표적 예술가는 Jacqus Louis David(1748-1825)와 그의 제자인 Jean August Ingres를 들 수 있다.

그들의 예술 세계에서는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찬양, 정치적이고 도덕적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무감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형식적 측면들이 있다.

그리고 다비드와 앵그르의 작품 후기에 나타난 나폴레옹에 대한 찬양은 그들의 작품세계에 정치적 면모가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도덕적 가치의 이론적 체계를 이상으로 여겼으며, 이는 이성중심의 논리적 세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영웅적 그림들에는고대 그리스 로마의 수학적 아름다움이 반영되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를 주축으로 한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의 모델이 수학이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이성중심의 세계관은 이미 플라톤이 내세운 국가론에서 이상으로 내세운 공명정대, 절제(soproshne), 덕(arte)의 정신과 통한다.

이는 그리스 미술을 한마디로 표현한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이란 빙켈만의 경구가 다비드의 그림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읽게 한다. 

우선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84년>부터 감상하자.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84>, 330 x 425cm, 루브르 박물관

 

로마를 숭배하였던 다비드는, 로마사를 주제로 한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를 통해 신고전주의를 상징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 작품은 1790년대 프랑스 혁명의 상징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회화의 내용은 이렇다.

기원전 7C 로마왕국에 호라티우스 3형제가 살고 있었다.  로마에 감독권을 행사하던 알바왕국과 로마는 영토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럽의 관습에 따라 두 왕국에서 3명의 병사를 뽑아 결투를 벌이게 함으로써 해결의 합의점을 본다. 알바왕국의 쿠리아티우스 형제 중 한 사람은 호라티우스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했고, 쿠리아티우스가의 딸 사비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 중 한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이는 양 왕국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 양쪽 집안은 비극을 잉태한 혼인으로 인한 사둔관계인 셈이다.

호라티우스 삼형제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카밀라는 오빠를 저주한다. 호라티우스의 장남은 로마를 위해 여동생을 칼로 죽인다.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손을 뻗어 칼을 잡으려고 하는 남자들이 호라티우스 삼형제들이고, 붉은 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남자가 아버지이다.

이들은 햇살이 비치는 왼쪽에서 건강한 남성미를 드러내는 주인공들인 셈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투기사와 같은 시선과 체격, 그리고 풍채를 자랑하고 있다.

그 뒤로 화면 앞에서 울고 있는 젊은 여자들은 비극의 주인공들인 사비나와 카밀라이다. 두 여자들 옆에서 아이들을 껴안고 울고있는 파란색 옷을 입은 여성은 어머니이다.

   다비드의 이 작품은 플루타크 영웅전을 모티브로 해서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언급한 예술가의 모방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플라톤은, 개인적인 비애를 노출하는 여성, 술에 취한 남성을 모방하기 보다는 정의로운 이상국가를 위해서는  개인의 비애를 넘어서서 용감하고 절제할 줄 아는 대의명분을 실천하는 자들을 모방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모방하고 있다. 

다비드는 5번의 도전 끝에 왕립미술 아카데미에서 제정한 최고상 '로마상'을 수상함으로써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5년 동안의 로마유학으로 다비드의 그 이후의 작품세계는 확고한 정립을 이룬다.

 

다음 감상할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130 x 196 cm, 메트로폴리탄 뮤지움

 

다비드는, 그리스 철학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현혹했다는 죄가에 따라 사형을 처하도록 언도되었음을 이해하고,  그가 감방에서 제자가 건네는 독배를 마시기 위해 잔을 받아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의 우측은 프리즈처럼 나열된 제자들이 협소한 공간에서 격정(pathos)을 표현하며 괴로워 하고 있다. 화면 왼쪽의 원경은 독배를 전달하고, 계단을 올라가는 3명의 간수에게 시선이 따라간다. 다비드는 간수들과 제자 9명을 설정하여 마치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12 제자와 나누는 것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화면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는 오른 손으로 잔을 잡으려하고, 왼손으로는 천정을 가리켜 자신의 결백은 하늘만이 안다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고함에 불복하지 않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소크라테스의 단호한 의지는 대의명분을 중시한 그리스 사회의 윤리적인 단면을 다비드는 표현하고 있다.  국가의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안락과 번영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그리스 사회의 이성중심의 철학의 한 단면이다.

노쇠한 소크라테스의 상체는 젊은 체육인의 근육과 다르지 않게 멋지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정신을 사랑한 그리스인들이 그 정신을 감싸주는 육체에 귀한 가치를 부여하였음을 노쇠한 철학가의 몸매에서조차 읽을 수 있다. 

 

 

<두 아들의 시신을 브루투스에게 되돌려주는 릭토르, 1789>, 323 x 422 cm, 르브루 박물관

 

다비드가 이 작품을 제작한 해는 1789년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특별히 정치적 선전을 염두하고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정신에 입각한 도덕적 의식을  계몽화 하려는 회화로 읽혀질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고대 로마의 정치적 인물인 브루터스의 공명정대를 다루고 있다. 그는 타르퀸 왕의 부패를 뿌리뽑기 위하여 로마에 공화정을 세웠던 인물로 자신의 두 아들이 애비가 세운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장면은 브루투스의 관리들이 처형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오고, 가족들은 2 아들의 시신을 보고 슬픔에 빠져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자식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브루투스는 화면의 왼쪽에 그늘진 곳에 앉아 있다. 그는 오른 쪽 팔을 괸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모습은 죄의식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 때문에 괴로워 하는 브루투스의 감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브루투스가 머리쪽으로 손을 가져간 포즈는 아들에 대한 죄의식이 감정 보다는 머리의 이성(reason)적인 판단에 따라 단행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회화의 전체적인 구도는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비슷한 구도를 보여준다. 공명정대한 영웅적 남성들은 왼쪽, 흐느끼는 여성들은 오른쪽에 배치하였으며, 배경에서는 고대 로마풍의 도리아 양식의 기둥이 서있고, 빛과 색채의 정확한 표현이 재현된 휘장이 처져 있다. 인물들의 자세와 동세는 물론, 여인들의 의상에서 보이는 드레이퍼리조차  고대 그리스 조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파리스 왕자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 1788>, 루브르 박물관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하늘에서 떨어뜨린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베누스(비너스), 미네르바(아테나), 유노(헤라)가 이 사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심사를 맡은 양치는 목동 파리스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이 때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는 세 여신을 이다산으로 데리고 가서 파리스로 하여금 미의 승자를 가리도록 하였다. 미네르바는 세상의 권력을 준다고 하였으며, 유노는 지혜를 준다는 조건을 제시하였고, 베누스는 자기에게 사과를 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준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결국 파리스는 베누스에게 에리스가 떨어뜨린 사과를 건네주었다. 베누스가 파리스에게 소개해준 여인은 스파르타의 여왕인 헬레네 였다. 그녀는 레다와 백조 사이에서 태어난 미인으로서 어린시절 테세우스에게 납치되지만 오빠들인 카스토와 풀룩스에 의해 구출된다.

그녀는 수많은 구혼자들 중에 스파르타 왕인 메넬라오스와 이미 결혼한 사이이다.

그러나 베누스의 소개로 파리스와 만난 헬레네는 서로 눈이 맞아 트로이로 도망하여 결혼식을 올린다.

다비드의 이 작품은 첫날 밤을 보내기 위해 헬레네가 잠자리에 든 파리스의 방을 찾는 것으로 그렸다. 파리스는 벌거벗은 몸에 잘 때쓰는 특유의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고, 헬레네는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고혹적인 표정과 자세로 파리스에게 기대어 서있다. 

파리스는 뜨거운 시선으로 헬레네를 응시하면서 거센 팔로 그녀의 팔뚝을 낚아채고 있는 중이다. 

파리스가 왼 손으로 들고 있는 수금과 침상의 형태는 로코코 형식처럼 현란하진 않지만 충분히 여성적인 스타일로 시선을 당긴다.

이 사실을 알게된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왕과 영웅들을 소집해 트로이로 진격해서 10년 동안 포위를 한다는 전쟁사가 호머의 일리아스에 소개된다.

전장이 끝나고 메넬라오스는 헬레나와 재결합 하여 행복한 노후를 맞는다.

 

다음 작품은 다비드와 앵그루의 스승인 신고전주의 화가 니콜라스 푸셍의 작품이다,

 

 

니콜라스 푸셍, <사빈느 여인의 약탈, 1637-3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로마가 설립된 초기에는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들의 부인을 인근의 사비니인들 중에서 구해야했다. 그러나 사비니의 남자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하나의 계략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평화로운 축제를 열어서 사비니인 모두를 로마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연회가 무루익을 무렵  로마의 군인들은 갑자기 무기로 젊은 여인들을 위협하며 약탈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에서, 푸생은  다수의 등장인물을 구도와 동세 면에서 정교한 연출로 작품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남성들은 저항하는 여성들을 무기로 무장한 힘으로 제압하며, 여성들에게 자신의 갈 길을 손가락의 방향과 무력으로 인도하고 있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듯이, 혹은 아폴로가 다프네를 쫒듯이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 마냥 정교한 수학적인 비례로 적용하여 회화로 표현하고 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 385 x 522 cm>, 루브르 박물관

 

160여 년이 지나고 다비드는 니콜라스 푸셍의 그림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이런 회화를 그렸다. 앞서 푸셍이, 로마의 건국 왕 로물로스가 남자와 영토를 학보하여 로마의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자손을 번성시킬 수 없었으므로 사비니의 처녀들을 납치하여 약탈하였던 그림을 그렸었다.

다비드가 그린 그림은,  약탈당한 딸과 여동생을 탈환하기 위해 사비니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 오나, 양쪽의 병사들 사이에 끼어든 여인은 로마에 약탈되어 살게된 사비니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비니 수장의 딸 헤르실리아로 로마 수장의 아내가 된 것이다. 수염이 덥스룩하게 난 사비니의 수장이자 아버지와 사자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러스의 유아시절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는 로마인의 수장이자 현재의 남편 사이를 중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빈느 여인들은 이제 <호라티우스의 형제들의 맹세>나 <브루터스에게 돌아온 아들의 시신을 건네는 릭토르>에서 보았던 힘없이 울고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아니다. 마치 프랑스의 잔다르크나 혹은 자유의 여신처럼 온 힘과 정신을 다하여 두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며, 로마에서 자식들을 낳고 둥지를 튼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유지시키려는 노력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비니의 군대에 소속중인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향해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과 전쟁을 하지 말 것을 온 몸으로 막는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이런 비극적 주제를 선택한 다비드의 의도에는 다비드가 프랑스 혁명을 통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으로 읽는다.

 

 

<나폴레옹 1세와 왕비 조세핀의 대관식, 1805-7>, 629x 979cm, 루브르 박물관

 

1804년 12월 황제의 공식화가로 임명된 다비드는 대관식의 의식을 기념하는 작품을 그리게 된다. 대관식의 의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폴레옹은 로마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아 스스로 썼다고 하는데, 다비드는 이 장면 대신에 이미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비의 관을 씌어주는 장면을 그렸다. 거대한 집단 초상화로 구상된 이 작품은 100명 이상의 실제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나폴레옹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대사는 그림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화면의 정면에서 보이는 별실에는 이 행사에 불참한 나폴레옹 어머니와 가족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는 다비드가 나폴레옹의 부탁으로 이 그림에서 착석시킨 것이다.

 

 

<알프스 산을 넘는 나폴레옹, 1801>, 246 x 231 cm, 예술역사 박물관

 

신고전주의는, 플라톤이 <국가론Republic>에서 언급한 이상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영웅들의 애국적이고 용감무쌍한 주제를 명확하면서도 단순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모범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세력들은 혁명의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초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시절부터 선전미술과 정치신문의 삽화 등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가 가진 파급력을 파악하여 그림의 주문과 검열, 수상제도를 철저하게 운영하며 관여하였다. 나폴레옹에게 화가는 정치인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높여주고, 미래의 자신의 정책을 빛내줄 정치적 수단으로 본 셈이다.

다비드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면서 프랑스 혁명정부에 가담하면서 나폴레옹의 공식화가가 되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극대화 한 대표적 작품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를 외친 나폴레옹은 단구라서 노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에 표현된 나폴레옹은 늘씬한 백마를 탄 용감무쌍한 용사로 표현되어 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완벽한 만족감을 이끌어낼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 아름다움으로서 택한 '선택과 집중'의 방법론을 생각하게 된다.

 

 다음 감상할 작품은 <마라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1793년 여름 프랑스 혁명중에 일어난 실화를 배경으로 그렸다.

 

 

<마라의 죽음, 1793> 161.9 x 124.7cm, 레이 옥스 데 보자르 박물관

 

저널리스트이자 급진주의자로 알려진 마라는 민중의 정치참여를 고취시켰던 프랑스 정치인이었다. 그는 루이 16세가 단두대형을 받는데 선봉자 역할을 했을 정도로 과격한 성격을 지니 소유자로 알려졌다. 또한 그의 급진주의적 성향은 대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은 반면에, 프랑스 왕권주의자들에겐 제거해야만 하는 정적이었던 사실이 피살의 동기가 되었다. 이윽고 1793년 귀족 출신의 열렬한 공화 당원이었던 여인 샬롯 코르도네가 거짓 편지를 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피부병으로 욕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마라에게 칼을 겨누었다. 이는 프랑스 조국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이었다.

개인적인 피살은 죽음을 당한 당사자나 집행자나 모두에게 위악이고,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이다. 그러나 조국을 위한 대의명분은 하나의 혁명으로 치부되어 이렇게 회화의 소재가 된 사례는 종종 있다. 다비드는 그런 정치적 사건을 회화의 주제로 삼으로써 대중 및 정치인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곤하였다.

이는 플라톤이 언급한 이상국가에서 공명정대로 보는 훌륭한 인물로 보이며, 모방해야 할 위대한 인물 일순위이기도 하다.

미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보이는 올려진 팔과 대비되는 마라의 축 처진 팔은 삶과 죽음, 야망과 폭락이 대비된 형식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감상할 작품은  <구걸하는 벨리자르, 1781>입니다.

 

<구걸하는 벨리자르, 1781>, 보자르 미술관

 

다비드의 이 그림은, 1767년에 마르몬텔의 소설이 출가된 이후에 대중적인 주제가 되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과거에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군인이 퇴역한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이제는 눈이 멀어서 지팡이의 역할을 해주는 작은 손녀뻘의 소녀에게 의지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구걸하는 늙고 초라한 노인의 행색이다.

동정심을 보여주는 여인의 뒤로 두 팔을 벌려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군인은 병든 노인의 얼굴에서 과거 상사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작품은 최초의 '감성적인' 신고전주의 그림으로 언급한다.

다비드는 노인이 된 걸인의 체구와 육체를 여전히 멋있는 최고의 이상적인 남성의 겉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그림의 배경에는 그리스의 도리아 기둥이 굳건히 서 있는 웅장한  성이 묘사되어 있다.

 

다비드의 마지막 작품으로 감상할 것은 <텔레마쿠스와 유카리스의 작별, 1818>이다.

 

 

<델레마쿠스와 유카리스의 작별, 1818>, 87 x 103 cm, 개인소장

 

프랑스 작가 페를롱이 1699년에 발간한 소설 <텔레마코스의 모험>에 따르면, 오딧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배가 난파해 칼립소섬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오딧세우스와의 사랑에 실패한 칼립소가 새롭게 나타난 오딧세우스의 아들을 또 유혹했다고 하는데, 그 사랑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칼립소 섬에서 텔레마코스가 사랑하게된 이는 칼립소가 아니라 그녀의 님프 가운데 하나인 에우리카스(유카리스) 였다. 칼립소가 상당한 질투의 분노에 떨었음은 상상이 간다. 그림의 장면은 칼립소 섬을 떠나려는 텔레마코스와 유카리스의 이별을 그린 것이다.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나폴로옹은 정치적 유배를 마셨으며, 다비드 역시 브뤼셀로 망명을 가야 했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멀어진 다비드는 말년에 <텔레마코스의 모험>과 같은 분위기의 정서적으로 로맨틱한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스틸로 감상하는 착각을 준다. 유카리스의 원피스의 옆 단은 작은 진주단추로 여며졌는데, 사틴수로 놓여진 짙은 핑크색 원단과 그녀의 생동감 있는 피부는 텔레마쿠스와 더불어 꽃다운 청춘의 심벌로 비춰진다.

 

이상으로 다비드가 그린 명화 감상을 마치고, 곧 이어 장 도미니크 앵그르의 작품 감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