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명화 읽기

19세기 리얼리즘- 구스타브 쿠르베

박연실 2016. 5. 12. 10:13

 

구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1855>

 

 

이 작품은 화가로서 쿠르베의 프라이드를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어서 먼저 제시한다.

 

 

<검은 개와 함께 있는 자화상, 1842>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로 소개할 다음 화가는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이다.

쿠르베는 프랑스 동부에서 부농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실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 법률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쿠르베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감상하며 그림연습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부친의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화가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사함으로써 숙련된 기교를 쌓았으며, 25세가 되던 1842년에 그린 자화상〈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Courbet with a Black Dog〉로 마침내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인 공공 미술전람회인 살롱전에 입선했다.

 

그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다.

 

1849년 그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청산하고, 오르낭에 있는 그의 가족을 방문한 계기로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한 2점의 그림〈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Breakers〉과〈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을 완성하였다.

 

<돌 깨는 사람들, 1849>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리거나 혹은 늙은 사람으로 보인다. 늙어 보이는 한 남자는 두 손에 망치를 들고 돌을 깨부수고 있고, 찢겨진 셔츠를 입은 어려보이는 남자는 소쿠리에 깨부숴낸 돌을 나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찌그러진 냄비에서 끼니를 떼운듯한 식기도구들이 널부러져 있다.

쿠르베는 고전주의 회화에서 보이는 이상화된 모방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이런 현실적인 가난한 노동자들을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작품을 하였다.

"천사를 그려보라"는 제안에 쿠르베는 단호한 발언을 한 바 있다.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으므로 그릴 수 없다." 이것이 쿠르베의 생각이다.

동시대의 미술 비평가 프루동은 이 작품을 보고, "모든 종류의 노동을 수행하는 훌륭한 기계들을 끊임없이 발명하면서도, 정작 뼈 빠지는 노역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현대의 산업 문명을 풍자한 그림"이라고 평론하였다.

 

 

<오르낭의 매장, 1850>, 315 x 668cm, 오르세 미술관

 

다음 해에 그린〈오르낭의 매장, 1850>은 한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그림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48명이 등장한다. 그림을 보면 ,신분이 제각기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포즈와 시선을 두고 있다. 그래서 감상자들도 어느 한 대상에 초점을 둘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이다. 이 두 그림에서 처럼, 쿠르베는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좀더 절제되고 이상화된 그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를 보이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귀족이나 영웅, 혹은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닌 평범한 농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르베가 평범한 서민들의 죽음을 매장하는 것에 대해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미술계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쿠르베 이전의 회화에서는 모든 그림에 중심 인물이 있었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위계적 내러티브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지극히 민주적(?)이라고 할 만큼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인 셈이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역시 기독교적 질서를 한 순간에 무너뜨린 십자가의 등장이다. 쿠르베 이전의 어떤 그림에서도 십자가는 항상 그림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쿠르베는 이 형식을 무시하고, 십자가를 그저 평이한 장식물로 전락시켜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 그림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비춰져, 쿠르베가 이 그림을 만국 박람회에 전시하려 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는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상투적인 수법과 인위적인 이상주의, 낡은 양식들을 없애버린 셈이다.

 

다음 감상할 작품은 <화가의 작업실, 1855>이다. 앞서 화가로서 쿠르베의 프라이드를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언급하였다.

 

<화가의 작업실, 1855>

 

쿠르베는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시즌에 맞추어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만국박람회전에서 이 작품은 수용하지 않았고, 박람회전이 열리는 산업궁전 옆에 작은 전시관에서 작품을 겨우 전시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화가가 쿠르베이며, 화가가 그리고 있는 것은 옆에 있는 누드 모델이 아니라, 고향 오르낭의 풍경이다.

그의 오른 편에 있는 나부는 진실을, 아이는 창조를 비유하고 있다.
오른쪽 군상에는 비평가 프루동, 후원자 샹플뢰리, 문학가 보들레르 등 쿠르베에게 정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또 부뤼야스나 부유한 미술애호가 내외 등 경제적 지원자, 또는 미래의 희망을 비유하는 젊은 연인들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잡다한 군상들은 당시의 다채로운 사회상을 비유하고 있는데, 캔버스 바로 옆에서 다리를 내밀고 앉아 젖을 먹이는 여자는 사회의 비참함을, 바로 뒤의 시체 사진이 실린 신문은 당시의 언론이 나폴레옹 3세의 어용신문이 되어 완전히 생명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옷감을 팔고사는 유대인과 부르주아의 생활상과 그 주변의 무덤파는 인부, 창녀, 어릿광대, 농민, 실업자 등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려 넣었다. 맨 왼쪽의 유대교 박사와 안쪽의 카톨릭 신부는 종교를 의미하고, 개를 데리고 있는 사냥꾼은 여가를, 바닥에 팽개쳐진 모자와 기타, 단검은 낭만파 예술의 쇠퇴를 의미한다
사실주의가 뜻하는 바는 회화란 구체적인 예술이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사조가 보여주었던 장면은 용납될수 없다는 것이 쿠르베의 신념이다. 
쿠르베가 여기에서 미술사적 경향조차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의 의미는 지금의 현실을 의미한다.

 

다음 감상할 작품은 <안녕? 쿠르베씨, 1854>이다.

 

 

 

 

사실 쿠르베는 심각한 재정 상태에 빠졌을 때 운 좋게도 부유한 후원자 알프레드 브뤼야스와 그 부인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다. 이 부부는 쿠르베의 대표작인 <화가의 아틀리에> 오른편에 등장한다.
이런 후원자 앞에서도 쿠르베는 자존감과 자긍심을 앞세웠다. <만남 ,혹은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라는 그림에 그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
쿠르베는 브뤼야스가 살고 있던 남프랑스 몽펠리에로 여행 가서 머무르는 동안 이 그림을 그렸다.햇살이 밝은 날, 밋밋하고 지루한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인물들 중 오른편이 화가, 왼편이 브뤼야스와 그의 하인이다. 붉은 머리의 브뤼야스는 모자를 벗고 환대의 제스처를 보여주고, 뒤에 있는 하인은 공손하게 머리를 굽혀 쿠르베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 작품이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발표됐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술계의 아카데미즘은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등의 규범화된 장르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르베가 내놓은 이 그림은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화여서 당시에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에는 화가 나름대로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다. 쿠르베는 화구가 가득한 배낭을 짊어지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 자신의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를 만난다. 이렇게 힘들게 후원자를 만났는데도 쿠르베는 조금도 주눅든 당황의 기색이 없다. 제목에서도 보듯, 화가가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후원자가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라고 하지 않는가!

쿠르베는 자신의 턱수염을 앞으로 치켜 올라가게 묘사함으로써 화가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로 표현하였다.

 

 

<프르동과 그의 자녀들,

 

동시대의 친구이자 평론가로 활약했던 프르동이 쿠르베를 예술사회에서 잘 커멘트 해준 것에 답례하듯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있는 프르동을  그렸다.

 

다음 작품은 쿠르베의 작품 중 가장 화제가 된 작품으로 <세상의 기원,1866>이다., 최근에는 벨기에의 행위 예술가 로버티스가 오르세 미술관의 <세상의 기원>작품 앞에서 자신의 음부를 관객 앞에서 보이며, 행위예술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변호는 이러하였다. 여성의 음부를 그리면 에술이고, 보이면 외설인가? 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기원,1866>

 

 

쿠르베는 <세상의 기원>에서 여성의 벗겨진 가슴과 성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 그림은 1866년 파리주재 터키대사 칼릴베이가 쿠르베에게 세상에서 가장 외설스러운 그림을 예술적으로 표현해달라고 주문하여 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모델은 화가 휘슬러의 정부인 조안나 히퍼던으로 전해진다.
현대철학자 라캉부부가 이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가려놓고 있다가 지인들이 왔을 때만 함께 놓고 보았다고...
이 그림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그려진지 130년만인 1995년 오르세 미술관에서다.

 

"남자들은 감히 성기를 그리지 않았어. 그건 바로 남자들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지. 그들은 자기들이 나온 곳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거든… 나는 네 보물을 돌려주고 싶어. 인류에게 주고 싶어."

한편 현대프랑스 여성 전위예술가 생트 오를랑은 남성의 발기된 성기를 그리고 <전쟁의 기원,1989>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전쟁의 기원, 1989>

 

 

이렇게 쿠르베는 고전주의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사실적인 사람들과 그 사건을 눈에 보이는데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래 그림 욕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욕녀들, 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