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논문 - 디자인 미학

사회적 미학에 대한 아이디어(Ideas for a Social Aesthetics)

박연실 2016. 9. 26. 00:00

사회적 미학에 대한 아이디어(Ideas for a Social Aesthetics)

 Arnold Berleant

 

 

 

 Arnold Berleant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事物들을 인식하도록 강요할 룰은 있을 수 없다. 가령 우리는 코트, 집, 꽃이 아름답다는 판단에 대한 기본적인 비례나 그런 이성의 도움으로 다른 이들을 강요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마치 그 사물들의 만족감이 감각에 의존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눈에 그 오브제를 복종시키기를 원한다; 가령 우리가 아름다운 오브제를 제시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보편적인 목소리로 우리가 말한 것에 신뢰하며, 그리고 그 반대로 모든 개별적인 만족이 그사람 자신의 만족감과 관찰자 자신이 유일하게 결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들에게 이 점에 동의할 것을 주장한다. .... 칸트가 말한 趣味判斷 자체는 모든 이들의 동의를 요구하고, ... 모든 이들에게 이런 동의를 돌린다.

 

미학은 오랫동안 예술과 미술이론에 관여하면서, 자연 안에 있는 悟性美와도 관여되어 왔다. 근대 미학의 창시자 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에게서 悟性(understanding)은 '감각적 인식의 완벽성'에 있다. 어떻게 해서 오성이 다양한 예술과 자연의 인식과 관련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을 보는 것은 수월하다. 이런 것들은 그것들의 양식성에서 지각적인 경험의 충분한 범위를 포용한 탁월한 감각성들이며, 그래서 감각의 수단들뿐 아니라 경험의 감각적 국면들 안에서 상상적인 회고를 포함하며, 탁월한 인지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해와 지각은 광범위하며, 모든 경험에 스며들고 있는 완벽하고 철저한 감각의 방식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취미는 스스로 사회 속에서 하모니를 가져온다. 지각의 모든 다른 형식들은 인간을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형식들은 감각적인 것에 배타적으로 설립하거나 혹은 그의 존재의 정신적인 부분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지각에서 유일한 미적 양식은 인간을 전체로 만든다. 왜냐하면 양자로서 그의 본성은 그것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조화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성은 문화철학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오브제들에서 미적인 것과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하나의 집중이며, 그것은 다른 목적이나 수반하는 적용이 없이 그 자체를 위한 오브제들에서 기쁨을 주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명상적인 하나의 반응이다. 오브제들에 호기심을 느끼고, 전통적인 미적인 것과 그들의 감상 자체는 사회적 미학의 가능성을 이끌어 준다. 누군가는 단순하고 경계가 주어진 예술 오브제의 상관있는 반응으로부터 하나의 통합적이고, 미적-사회적 상황으로 진행하는 예술의 연속을 발전시킬 수 있다. 경계가 주어진 오브제의 유일한 범례로서 회화는 2차원에 의해 쉽사리 경계가 지어진 프레임에 의해 감상적인 눈을 위한 명백하고 편안한 촛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조각은  덩어리로서 공간을 유일하게 채우지는 않는다. 조각은 주변의 공간을 채우며, 관람자가 감상의 행위 안에 들어가 하나의 아우라를 창조한다.

 

우리는 건축에서 바깥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펼쳐진 확장된 공간을 발견한다. 덩어리는 공간을 둘러싼채 개방되었으며, 이런 인테리어 볼륨은 사람들로 하여금 채우도록 초대한다. 동시에 건축은 물리적 구조와 더불은 앙상블 속으로 공간을 합병하면서 대지의 주변 공간 속으로 조각의 아우라를 훨씬 넘어서서 도달한다. 예술가들은 건축에 들어서서 명백한 예술의 확대를 도모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거주하도록 환경을 구조화 한다. 건축환경은 회화의 2차원을 첨부하며, 조각적인 덩어리의 3차원을 첨부하고, 세속적인 차원인 4차원을 첨부한다. 시각적이고 의식적으로 명료한 예술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관찰자는 환경을 움직이고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미학에서 이론적이고 지각적인 구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미학에서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며, 예술가에 의해 고안된 하나의 환경은 하나의 지각적 구성으로 제작된 것이며, 이는 모든 환경에서 발견되었던 모습들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환경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맥락이다. 그리고 환경은 인간이 경험하는 장소로써 인간의 관계성이 상황지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사회적 환경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예술 오브제의 미학은 사회적 미학의 가능성에로 이끌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상자로부터 시작한다면 같은 지점에 도착하는 것이다. 감상적 경험은 전반적으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경계하고 집중하였던 집중력을 적어도 요구한다. 비록 구속된 오브제들의 전통적 미학과 무관심한 감상자들이 사회적 영역에로 결국 이끌어진다고 하더라도, 미적인 이론이 맥락적으로 전개되고, 미적인 것의 사회적 관련성은 여전히 현저하다.

 

맥락으로서 미학(Aesthetics as contextual)

 

하나의 맥락적인 이론에서 미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우세하거나 유일한 모습은 없다. 그 대신에 사실들의 숫자는 포괄적인 상황 속으로 연합된다.

 

수용성(Acceptance)

 

미적인 만남에서 감상은 판단이 부유하는 동안에 경험하기 위하여 하나의 개방성을 내포한다. 선택적이고 제한된 집중에는 심사숙고한 노력이 있으며, 일상 삶에서 터널비전은 특별한 오브제들과 특별한 목표의 중심에 있다. 이런 종류의 집중력에는 다른 오브제들과 활동으로부터 그들을 분리하여 예술작품들에로 쉽사리 이동된다. 비록 칸트가 실제적 관심에 대한 목적론적 형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유명한 명귀 "목적없는 합목적성(Purposiveness without purpose)"에는 실제적 오브제가 없다.

20세기에는 그와 같은 한계에 대항하여 예술의 팽창에 성공적으로 분투하였다.  적절한 조건을 줌으로써 어떤 것은 예술이 되었으며, 혹은 전통적인 예술 오브제가 되거나, 혹은 어떤 것은 실제적 유용성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예술의 영역은 확장되었으며, 그래서 미적인 감상의 범위는 대단히 확대되었다. 어떤 것도 아프리오리한 것을 차단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감상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한다. 이 점은 오브제만큼 그런 상황에 응용되는 것이며, 특히 예술 오브제는 그 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때로는 개념들, 프로그램들, 발견된 오브제들과 철학으로 까지 대체되기도 하였다.

 

지각(Perception)

 

지각은 모든 경험에서 기본적이다. 여기에서 지각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미적인 인식에 있어서 그것의 우세권이 있기 때문이다. 바움가르텐이 그리스 단어 aisthesis를 채택하였을 때 적절한 조건을 줌으로 '감각을 통한 지각'은 새로운 학문의 명칭이며, 미를 향하여 지시된 '감각적 인식의 과학'으로서 미학을 정의하였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은 오랫동안 알려진 사회심리학이나 지각의 심리학으로서 순수한 감각은 아니다.

수많은 요소들은 뇌의 생리학과 다른 유기적 기능들로부터 교육의 형성적 영향과 다른 문화적 상황과 실천까지 우리의 감각의식을 형성하며, 그래서 우리의 믿음체계를 알려주고, 우리의 반응에 영향을 주고, 지각의 수많은 단계의 복잡성에 기여한다. 그럼에도 감각(sensation)은 그것의 중심에 있으며, 지성적 인식, 신비로운 행복, 그리고 강렬한 물리적 활동과 같은 의식의 다른 양식들과 차이가 있다.

미적 지각은 보통 꽃봉우리, 돌, 폭포수의 형식에서 기념비적인 것, 협곡, 혹은 전체적인 조경과 같은 특별한 미의 작은 오브제들로부터 자연에 대한 우리 인식의 가슴에서 늘 존재해왔던 예술에로 독특한 것으로 고려되곤 하였다. 지각적인 경험은 어떤 사회적인 경우를 독점하는데, 이를 테면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혹은 친구와 연인들 사이에 감정의 순간이나 또는 싸움과 증오의 시간을 들 수 있다.

 

감각(Sensuousness)

 

감각은 지각적인 경험의 심장부에 있으며, 감각들이 제공한 쾌는 여기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준다. 전통적 미학은 감각의 충분한 영역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지성적인 전제에 의해서 구속되어 왔다. 플라톤부터 헤겔까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대부분 독자적인 미적 감각을 표명하였으며, 그것은 먼거리 수용기(a distance receptors)이며, 지식의 명상적인 모델로 공고히 함으로써 그것의 오브제를 분리하고, 먼거리에서 그것을 정착시켰다. 모든 감각들은 미적 만족을 주는데, 촉각적이고, 후각적이고, 미각적이고, 피하에 있는 미적 운동의 지각이라는 근거리 수용기(proximal receptors)를 포함시킨다. 더군다나 보편적 신념으로써 경험은 분리된 감각적 체널을 통해서 흘러가며, 지각에서 실제적 공감각을 왜곡시킨다. 지각적 경험에서 감각은 분리되지 않게 융합하고, 그리고 공감각은 미적 인식 안에서 특별하게 공언된다. 

 

발견(Discovery)

 

지각적 의식의 중심 장소로부터 미적 경험은 적어도 원리 안에서 존재하며, 미적으로 취해질 수 있는 것에 관한 선입견에 의해서 자유롭다. 사인들과 실마리에 의해 제공되는 일상적 경험은 또 인지에 대해서 충분하지만, 단순한 흔적에로 지각적 내용을 종종 감소시켜주며, 또 경험이 습관적이거나 틀에 박힌듯이 반복적일 때 미적인 특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미적인 경험 안에서 의미성에 관한 보편적 질서는 뒤바뀐다. 지각적 성질들과 경험된 의미들은 집중력의 중심에 있으며, 그런 모습들은 주목되지 않거나 혹은 중요성이 무시되었었다. 이런 점은 기대하지 않았던 오브제들과 사건들에 미적인 경험의 영역을 개방해준다. 미적인 지각은 집중되고, 또 선택적이기 때문에 진기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들과 관계성을 나타낸다.

 

독특성(Uniqueness)

 

일상적 경험은 일상적인 다른 것들로부터 어느 면 지각적으로 독특하며 다르다. 이 점은 지각에 대한 강조로 인해서 미적인 인식 안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취하고 있다. 반복된 오브제들과 사건들에서조차 서로 중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반복은 그것의 전임자들을 반향하며, 한편 동시에 반복에 따른 그것의 영향력을 계획하면서 따를 것이다.

 

상호성(Reciprocity)

 

하나의 미적인 상황 안에서 개진되고 있는 요소들의 상호작용은 때때로 간과되어 왔다.그러나 이 점은 예술과 더불은 강렬한 개입 안에서 변함없이 일어났다.

예술 오브제에 대한 경험은 예술 오브제를 마주한 사람의 지식과 태도에 의해서 심오하게 영향을 받는다. 동시에 그 오브제는 감상자에게 영향을 미치며, 의식의 특성과 성질을 섬세하게 교체시킨다.

예술과 감상자 사이에 상호작용은 예술가와 수행자와 같은 미적인 상황이나 영역 안에서 다른 활동적인 요소들을 포함한채 유사한 교환과 더불어 중첩된다. 때때로 이런 점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른 시기에 단순하게 재-창조적이고, 관객의 집중력을 활동적으로 만든다. 모든 이런 요소들은 정보와 해석적인 판단, 그리고 인지적 내용의 다른 종류에 기여하며,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늘상 지각적인 양식을 가정케 한다. 상호작용에 따른 예술에서 최근의 강조는 미적인 영역 안에서 오브제, 관객, 예술가. 그리고 수행자의 다이나믹한 교환을 명료하고 탁월하게 만들었다. 

 

지속성(Continuity)

 

언급한 이런 참여적인 요소들은 상호작용하고 중첩될 뿐 아니라 미적인 상황의 살아있는 경험 안에서 서로가 뒤섞여지기도 한다. 미적인 영역들의 구성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반성적인 거리감으로부터 우리가 그릴 수 있는 특징들은 사라져 갔으며, 경험에 부과하고자 한 영역의 분리는 지속적으로 녹아 들어가면서 그것을 포착하고 조정하고자 도와준다. 이 점이 미적인 경험의 우선적인 주위환경이며, 그것의 맥락적인 특성을 구해준다.

 

개입(Engagement) 

 

개입의 개념은 맥락적인 미적 상들을 켑슐에 넣고 있다. 미적인 개입은 감상자와 예술 오브제, 예술가와 감상자, 그리고 수행자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 전통적인 분리를 단념한다. 전통미학은 감상자와 예술 오브제 사이에 심리적 거리감을 부여하였으며, 예술이 격려하는 참여적인 개입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벽이었다. 유사하게도 그 분할은 다양한 요소들이 긴장과 반대를 소개하였으며, 또 그렇게 만드는 습관 속에 있다. 미적인 개입 안에서 경계선들은 희미해졌으며, 우리는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이런 요소들의 지속성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미적 거리감이란 선입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전통적인 미술이론이 발견한 바를 강조하면서, 예술에서 충분하고 가장 강력한 경험과 자연미가 미적으로 상처받기 쉽고, 경이감 속에서 친근한 전념을 드러낸다고 형이상학(예술과 자연)을 이분한다. 

 

복잡성, 다양성(Multiplicity) 

 

미적인 것은 경험 자체의 특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오브제나 장소의 독특한 종류에 한정하지 않으며, 외부적이거나 아프리오리한 구속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적 인식이 개진할 수 있는 경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어쨋든지 어떤 오브제도 내포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미적 개입은 드물거나 구속적인 사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점은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지각적 능력이나 의지에 의해서만 한계가 주어진다. 동시에 미적 경험은 모든 상황을 독점하지 않는다. 종종 미적 특성은 종교적이고, 실질적이고, 기술적이고, 혹은 인지적인 것으로서 다른 요구나 관심 아래에 두기도 한다. 때때로 '미적인 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기대치에 기대어 연이어 일어나며, 미적 가치들은 인간문화의 전 범위로 침투된다.  미적인 상황의 이런 특색들은 그것의 맥락적인 특성을 설정하거나 또 반영한다. 예술에 관한 논의는 유일한 특색의 중심에 있으며, 대부분 예술 오브제에 관한 것이거나, 혹은 때때로 감상자나 예술가에 관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提喩(synechdoche)에 의해서 잘못되가고 있으며, 마치 그것이 전제 영역인 것처럼 상황에 참여하고 있다. 비록 감상자가 그리고 오브제가 서로간에 관련된 것처럼 고려되었을 때 조차도 그들은 보통 여전히 기본적으로 자기-포함(용적)으로 고려된다. 더군다나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경험에서 창조적이고, 재창조적이고, 형성적인 국면을 내포하지 않는다면 부분적으로 그와 같은 동일한 에러는 발생하고, 또 그 설명은 파편적으로 남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표현, 재현, 감정, 형식주의에 관한 논의는 잘못 소개된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미적인 영역에서의 개념은 여기에서 유용하다. 왜냐하면 객관적이고, 지각적이고, 창조적이고, 형성적인 영역은 실제로 통합으로서 경험된 혼합으로 상호교직된 포괄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미학(Social Aesthetics)

 

비록 맥락적 미학의 설명이 예술과 자연에 주로 촛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관계성은 그것의 상황적 특성에 현저한 유사성을 배태하고 있다.

이런 점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술의 어떤 점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건축을 생각해보자. 빌딩의 예술로서 단순히 건축을 고려한다는 것은 건축이 전 환경을 실제적으로 조직하는 가운데 방식을 왜곡시킨다. 빌딩의 디자인은 그 모습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빌딩이 쉬고 있는 대지에도 영향을 주고, 구조의 지각은 그 곁에 있다. 때때로 사실, 하나의 빌딩은 전체 이웃에 그 특성을 던지며, 이는 빌딩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오브제가 아니라서 건축 내에서뿐만 아니라 건축 바깥과 내부, 또 건축을 향한 운동의 패턴들을 결정하며, 인간 활동에 대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은 건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물리적 구조의 예술로부터 복합적인 사회예술과 환경적인 조직체 속으로 변형시킨다.

 

가령 극장은 사회적 미학을 구체화 한다. 비록 극장 디자인, 세트, 그리고 의상들이 관객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극장의 심장부는 물리적 성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극장의 특별한 기여는 사회적 상황의, 특히 인간관계의 묘사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나타난다. 이는 극장이 우세한 사회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환경을 창조하므로, 극장의 미학은 중요하게 이 문제를 채택해야 한다. 그 외 영화와 텔레비전은 다른 텍스처 속으로 유사한 영역을 해로로 고르게 하며, 이런 미디어의 본질은 그것들이 창조하였던 경험의 질적인 성질을 결정하고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 장르와 스타일이 거대하게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시네마는 시각적 범위와 강렬성이란 개별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극장의 특별한 힘을 유래시키는 대단히 물리적 현존을 대체시켜 왔다. 마음의 눈으로써 카메라는 의식적이고 잠재적인 의식 양자를 보이지 않게 지시하면서 그 자체 권리 안에서 대가 수행가가 되었다. 텔레비전은 유사한 과정을 보여주지만 작은 규모의 상황 안에서 최고로 작업하며, 그 곳에서 보는 사람(시청자)에게 근접성(proximity)과 자즌 클로즈-업은 조용한 언행의 친근성과 혼합되면서 그 자체의 명확한 성질을 가진 사회적 상황을 창조한다.

이런 탁월한 상황적 예술 각자는 - 건축, 극장,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 은 미적인 개입의 명확한 양식을 확대해 준다. 그것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사회적 미적 상황의 연속을 구성한다. 각자는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는 인간 참여자들을 연루하고 의존하며, 각자는 미적 지각이 사회적 의미를 옮겨주는 방식에 대한 오성에 기여한다. 이 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주기 위해서 보편적인 카테고리와 원리들은 미적인 오브제와 그것의 성질들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꼭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장소에서 우리는 사회적 미학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 상황의 미학은 무엇처럼 보이는가?

아마도 그것은 환경 미학과 유사하며, 어디에선가 많이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것의 미적인 특성을 설정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또 그것의 명확한 정체성을 주는가: 즉 참여자들, 물리적 세팅, 사회적 조건은 시간, 역사, 문화와 전통의 강력한 영향력과 함께 오며, 그 모두는 미적인 경험의 지각적 특성 속에서 같이 한다. 인간의 현존은 경험적으로 가능한 것을 알고, 또 언급하게 되는 것은 환경일 확률이 높다.

 

사회미학은 환경미학의 종류 일 수 있다.

당시 사회적 미학은 상황의 미학이다. 상황의 특별한 종류와 동일시 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미적인 질서와 같이 사회적 미학은 맥락적이다.

그것은 또한 상당히 지각적이다. 왜냐하면 강렬한 지각적 의식은 미적인 것의 기초이다. 비록 그들의 특별한 정체성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모든 미적인 영역에서 유사한 요소들은 사회적 미학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 한편 해석과 의미를 제공하는 지각적인 상들을 강조하고 형성하는 그것의 참여자들 가운데 작업하고 있는 창조적 과정들에서는 예술가들이 없다. 확실히 여기에는 예술 오브제가 아니며, 상황 그 자체는 지각적인 집중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것은 지각적인 조각이나 환경 안에서 작업하는 것이다. 동시에  참여자들은 상황의 미적 특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기여하며, 그들은 그것의 특별한 성질이라는 감상적인 기쁨을 인식하며, 한 사람의 수행자로써 작업은 증가하고, 또 그들을 고양시킨다. 그와 같은 방법들에서 사회적 상황은 인간관계를 구체화 하면서 미적으로 되가는 것이다. 

 

쉴러가 미에 따른 인간존재에서 사회적 성격의 근원에 기여하였을 때, 그는 이종의 성질들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능력을 경험하였으니, 특히 서구 세계 문화에서 다른 것들과 경쟁하고, 투쟁하는 것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보편적인 반대로서 쉴러는 정신 물리학의 근원으로써 "감각적[부분]"과 "존재의 정신적 부분"을 일치시키고 있다. 사회적 하모니는 취미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으며, 쉴러는 이것이 하나의 개진된 미적 감수성으로 의미하였다. 이것은 마음의 상태는 아니다: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것의 조화는 인간 지각의 모든 국면들에서 충분한 참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것은 대단히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적 상황은, 그것의 지각적이고 다른 특성적 미적 상이 독점하였을 때 미적인 상황의 특성적인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것들의 충분한 수용, 높은 지각, 특히 감각적 성질들, 발견에 있어서 신선함과 흥분, 사람들과 상황들의 유일한 인지력, 상호적인 반응, 관련되고 통합된 경험의 경우, 충분한 개인적 개입에 따른 분리의 포기와 배타적이고 구속력 있는 포기는 인지를 방해한다. 당시, 하나의 사회적 미학은 충분한 통합이며,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것의 동등한 통합은 미적인 것으로써 대단히 사회적인 하나의 목표이다. 하나의 목표는 미적인 것 만큼 대단히 사회적이다.

 

당시 사회적 미학은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것의 동등한 통합으로써 미적인 것만큼 사회적인 것이 하나의 목표이다. 수많은 보편적 사회적 사건은 미적 경험과 분석에 스스로를 빌려주며, 축약(in the abstract) 안에서 이런 논의를 떠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것들 각자는 우세한 미적 특성을 띄는 방식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초대한다. 이런 세팅들은 미적인 것으로써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는 혼용되고, 배타적 특성은 아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미적이고 사회적인 상황(Aesthetic and Social situation)

적절한 에티켓은, 전통이 실제적 내용이 없는 것처럼, 규칙적인 패턴을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상호작용을 용이하도록 제공하듯이, 규칙이 지배하는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해석된다. 그와 같은 행동의 교화가 어떤 우아함을 추정할 때, 참여자들이 개입된 재능들 속에서 기뻐할 때,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으로 공허한 의식 속으로 천재적 인간내용이 소개하기 위하여 애쓸 때 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점이 발생될 때 발견, 지각, 호환성, 그리고 다른 미적 모습들은 에티켓과 더불어 가끔 연상되는 불모의 형식주의를 극복한다.

대단히 유사한 방식들 속에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의식들은 미적인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 종교적 의식들은 때때로 극장에 자격을 주며, 그리고 생생한 드라마는 다른 의식들, 축하, 축제들을 발생시킨다. 전 사회는 쉴러가 언급한 하모니를 소유하는 것 같다. 하나의 그와 같은 문화는 Papua New Guina에서 살아있는 종족 Foi에서 볼 수 있다. Foi 사회는 거주지와 전면적인 영토와의 관계에 있어서, 언어와 운동 사이에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면서 미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과 육체 사이에, 혹은 삶의 존재와 죽음의 존재 사이에 경계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Foi sung 시는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써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연속성을 지녔다는 의미에서이다. 더군다나 이 시는 공동체의 살아있는 세계의 산만한 삶 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와 같이 미적으로 통합화된 사회는 사회적 상황에 따른 미적인 상황의 성질을 때때로 보여주면서 덜 우호적인 사회 안에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작은(어린)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가끔은 미적인 특성이 보이며, 그 때 우리의 판단은 보류된채, 지각은 감각적인 성질 안에서 특별한 쾌로 고양된다. 그런 성격의 특성은 루벤스가 그린 아이로 Nicholas에 묘사되어 있다. 그와 같은 경우에,  다른 미적 상들을 쉽사리 얻을 수 있다: 발견, 독자성, 호환성, 지속성, 개입, 그리고 유사한 종류에서 다중적인 발생의 가능성 등이다. 미적인 상황에서 이런 특색들은 막역한 우정에서도 대단히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아리스톨은 상호간의 신뢰 위에 설정된 완벽한 우정을 기술할 때 상호간에 분리할 수 없는 친구의 선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사회적 미학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강렬한 경우들은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수많은 형식들에서 발생한다. Love는 인간관계에서 자나치게 사용된 어휘이지만, 최근까지도 그 단어는 철학에서 보편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美(beauty)"는 철학적 미학에서는 보편적인 용어이지만 인간관계를 기술하는 데서는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관계에 관한 사랑의 철학을 쓰고, 그들의 희귀성을 쌍으로 맺을 수 있는 가?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관계에 관한 미의 철학도 쌍을 맺을 수 있는가?  미와 사랑 양자는 대상들의 형식적 모습들이 아니고, 관계있는 아이디어들이다. 여전히 그것들은 상황의 특성들을 반영한다.

그들의 관계성을 추구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에서, 사랑이 미의 공언으로서 미적인 상황에 대한 특색을 통해서 밝혀진 바는 이렇다 할만큼 말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 대한 바로 유일한 모습을 커맨트 해보면, 아마도 그것의 중요한 모습과 아울러 다른 것을 함축하는 하나도 있다: 즉 미적인 개입의 아이디어이다.

비록 예술과 사랑 사이에 명맥한 차잇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사성들은 현저하다. 그들의 보편적 감정적 특성을 고려해보자. 섹스피어는 음악이 최음을 일으킬 수 있는 바를 처음으로 어렵게 인지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은 고통스런 성욕을 일으키는 힘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자극이나 고통이던지 간에 예술은 호색적인 열정을 자극하는 그 이상으로 하며, 사랑의 수행이나 유일한 원인을 넘어서 진행해 간다. 이런 방법들로 예술을 다룬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예술과 열정 사이에 더 친근한 관련성을 수용할 수 없으며, 예술과 열정 사이에 그 관계성은 다른 것들의 조건이나 혹은 단순한 경우 이상의 것이 내포되는가?

나는 사랑과 예술이 분리된 것을 호기심 없이 연결하고, 바깥 면들을 실없이 연결하는 것들을 믿을 수 없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이상으로 자매와 혈족의 관계 이상으로 닮아 있다. 예술과 사랑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미적인 것'으로 연상할 수 있는 그 특성들이다. 차이가 있는 것은 사건발생 보다는 그 이상의 참여자들로써 경험의 종류 보다는 활동의 종류 그 이상으로 우리가 개입되어 있다. 사랑은 인간관계에 관여하며, 비록 Thoreau처럼 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풍경, 장소, 집, 혹은 오브제를 사랑할 수 있다. 미적 경험은 감식가, 오브제, 예술가, 그리고 활동인들을 연결해준다. 확실히 사랑의 어떤 종류들은 유사한 퓨전을 반영한다. 어쨋든 예술 안에 개입된 것은, 중심 장소를 가득 채우는 오브제의 상들에 거주한다. 충분한 감상적 개입 안에서, 가끔 발전하는 것은 회화적 특성들이나 혹은 회화 안에서 이미지와 더불은 개별적인 교환의 감각이다; 음악 작곡의 펼쳐짐에서처럼, 작품에서 동적인 진보의 공유; 춤에서 움직임의 연속 안에서 친근한 개입과 연극과 소설에서의 분규와 극적인 해명; 극장에서 인간상황은 혈족의 강력한 감정을 환기해주고, 혹은 신의 현현을 알리는 강렬성과 인간의 정서이입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랑의 바로 사인들이며, 형식과 사례들의 다중성 안에서 보편적인 성분들이다: 드라마틱한 전개에서 감각, 다이나믹한 진보에서의 공유, 개인적 교환, 드문 인간상황에서의 의식, 감정이입과 정체성에서의 감정을 얘기할 수 있다. 예술과 사랑에서 우리는 공동체, 경계선들, 장벽들의 와해, 장소에서 존재의 감각을 갖는다.

그와 같은 연결성, 그와 같은 지속성, 그와 같은 개입은 미적인 것의 바로 중앙에 있으며,  가장 강력한 경우에 위대한 강렬성을 가지고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연결을 인식하고 있다. "인간 개성(Human personality)"이란 Simon Weil의 에세이에서 "집중력의 양식, 사랑에 집중은 비개인적인 수준에서, 오브제(혹은 사람)와의 커뮨에 참석하는 이는 가능하며 - 예리함, 이해력, 감정으로 그것을 본다" 오브제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미적인 개입을 특성화하고, 한편 여기에서 비개인성은 분리성의 분실, 셀프의 분리감각을 언급한다. 이상하게 평행하는 패션에서 Thoreau는 사랑스런 우정에 자연에 대한 미적인 관계를 연결하였다.: "나는 자연을 사랑해서, 노래하는 새를 사랑해서 반짝아는 그루터기, 꽃이 있는 강가,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 나는 그대들을 내 친구로 사랑한다"

 

미적인 접촉과 더불어 연속성, 참여, 그리고 개입, 또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유사성은 두 개의 가장 인간적인 경험들 사이에서 이질동상(isomorphism)과 구조적인 유사성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적인 상황으로써 예술과 사랑 양자를 기술할 수 있다. 양자는 판단이 없이 최선에서 수용성을 함축하며, 자유로윤 가치를 보여준다. 한 때 우리는 소유욕, 탐험, 불안정, 에고이즘, 질투, 힘을 버렸으며, 이런 것들의 대다수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떠나있으며, 친구이든지, 어린아이이든지, 혹은 부모이든지 간에 그것의 미적인 특성을 떠나있다.

'윤리성의 교훈'은 감각, 상상력, 기억의 지각적인 영역에서 거주하며, 그리고 이 양자는 상황의 감각적인 성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훌륭한 예술과 같이 풍요로운 사랑의 관계는 새로운 것, 놀랄만한 의식, 인지력, 재-인지를 수용하며, 예술에서 독특한 개별적인 모습들이나 사랑 오브제는 집중력의 포커스가 되었다. 그것은 궁극적인 특성이다. 더군다나 예술과 사랑은 미적인 상황 안에서 요소들과 힘들 가운데 상호성의 의식을 환기시킨다. 다양한 예술과 사랑의 다른 양식들은 유사한 방식들 안에서 호환성을 보여주며, 참여하고 있는 요소들은 서로간에 혼용되어 있다. 구별과 분리는 사라졌으며, 감정이입의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예술과 사랑은 공유된 삶의 감각, 구분이 사라진 가운데 어떤 지속성, 단일자, 친밀성이 감각을 낳기 때문에 이런 관계성은 개별적인 것이다. 진정 사랑은 Empedocles가 B.C.E. 5세기로 후퇴하여 인지하였던 것처럼, 그가 기술한 사랑은 우주에서 매력적으로 하나로 연결하는 힘으로써, 어떤 것과 경계선들을 녹여주고 묶어주는 힘이다.

최종적으로, 예술과 사랑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경우들과 관계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배타성이 없이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이점은 아름다움 것의 사랑이 아니고, 혹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길로서 사랑이다. 이는 Symposium에서 Diotima로부터 배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이다. 그것은 미보다는 차라리 사랑이며, 그들 중의 양자는 다양하고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미학의 정치(The Politics of Social Aesthetics) 

 

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합류점은 사회적인 것이 정치적 패턴 속에서 그 자체를 형식화 하는 가운데, 그런 영역으로 옮겨준다. 여기에서 사회적 미학은 의미있고 강력한 함축을 가지고 있다. 쉴러는 그 방법을 다시 지적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전제권과 특권도 없이 취미가 지배하는 곳에선 견디어지며, 그리고 미적인 외모의 영역은  그것의 동요를 낭비한다.... 미적인 국가에서 모든 것은 - 제공하고 있는 연장조차도 - 자유로운 시민은, 최고의 고상함과 더불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 여기에서 미적인 외모의 영역에서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기꺼이 깨닫는 것과 동일하게 가득찬 이상을 발견한다.

 

"미적인 국가"란 단순히 미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이며, 혹은 사실상 천재적으로 정치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양자일 수 있는가? 만약에 미적인 국가가 어떤 면에서 정치적이라고 한다면, 그 때 미적인 상태에서 동등한 것은 무엇인가? 미적인 것은 스토아 철학과 초기 기독교에서 촉구되어 왔던 수많은 의미와 실천들로부터 동등성의 다른 의미를 제시하는가?

 

미적인 모델은 정치적인 질서와 다른 사회적인 제도를 수용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평행선들과 함축들에 의해서 이런 질문들을 고려하게 된다. 미적인 상황에서 오브제에 대한 의지적인 수용성에 따른 사회적 동등성은 모든 사람의 본래적인 가치를 인지하는 가운데 있다. 경험의 모든 종류들에 미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준비처럼, 각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용성은 사회적 윤리의 필수조건이었다. 그 누구도 아프리오리한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지각에 대한 미적인 강조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제안함으로써 행동, 실천, 법, 인간에게 적용하거나, 혹은 경험에 따른 다른 대리나 원리들과 규칙들이 아닌, 그들의 경험적인 공명정대함에 따라 이끌어 주는 경험의 즉각성에 바탕을 둔 제도에 응용한다. 미적인 의식에서 감각성은 정치적인 질서 안에서 인간구현의 사실 속에서 그 평행선을 가지고 있다. 미적인 상태는 비권위적이며, 비위계적이어야 하고, 그 어떤 형식 안에서도 힘과 권력의 부과는 사회적인 다이나믹 안에서 거절되어야 한다. 천재 호환성은 욕구될만큼 성취하기가 어렵고, 그 과정에서 모든 파티들은 변형한다. 그러나 진실한 화해와 협동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호환성(reciprocity)이란, 투쟁이 아닌 협동을 진작시키는 사회적 이상 속으로 미적 지속성을 전환시켜 주었으며, 한편 지속성을 방훼하는 다른 그와같은 분리와 고전적 분할을 융해시켜 주었다. 사회적 그룹 안에서 인간관게를 고양시키고, 그 반대를 화해시킴으로써 미적인 개입에 따른 사회적 동등성은 개인적인 관계 안에서 친밀성을 격려하고, 그리고 반대 속으로 그들을 형성하고, 또 인간을 분리시키는 형식화된 구조를 부인한다. 더 나아가 다중적 미적 경우들로 들어가기 위한 개방성과 준비성은 자유롭게 리드해가는 자유로운 연상에 따른 사회적 다수주의에 대한 기반이 되었다.

 

사회적 미학의 이상은 인간관계에서 명확하고, 신선하고, 조명을 환히 밝히는 접근을 제공한다. 그 점이 우정의 형태나 가족, 혹은 국가의 형태에서든지 간에 상황들의 다른 종류에 유연하고, 또 채택적인 접근을 주며, 하나의 긍정적인 눈으로 사회 안에서 질서의 어떤 종류에 대한 필요를 보여준다. 보편적인 사회적 동력은 법적이고 재판적인 체계로부터 정치적 힘과 개방된 억압까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투쟁과 사회들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반대의 에토스가 남아서 관리한다. 어쨋든 완곡어법은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사용되며, - 경쟁력, 마켓의 자유로운 플레이, 개인주의 - 투쟁은 본질적으로 압력적인 표준이다. 그것은 격렬함의 진정한 모델인 힘의 사회적 동력에 의존하며, 그러나 경건한 이데올로기나 온화한 언어에 은폐되어 있다.

 

사회적 미학은 지지와 상호간의 모델과 더불어 투쟁의 패턴과 대체되고 있으며, 사랑의 진정한 모델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그리고 최선에서 인내력, 호환성, 그리고 동등성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주는데 있어서 사회적 미학은 진실된 인간 커뮤니티네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쉴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이끌어 준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