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논문 - 디자인 미학

Sniffing and Savoring - The Aesthetics of Smells and Tastes

박연실 2016. 10. 19. 13:16

 

안녕하세요? 일상의 미학과 디자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이전에 번역했던 원고파일을 찾아서 올려봅니다. 다시 정리해야 할 주제라서 유효할 것 같네요.

 

아래의 꽃은 함박 쟈스민인데, 작은 크기이지만 향기가 아주 매혹적이라서 이 연구주제에 합당한 식물이 되겠네요.

 

 

ebrady.jpg

 Emily Brady     

 

 함박 쟈스민, 일명 아라비안 쟈스민

     

 

             

 

 

 

 

Sniffing and Savoring

The Aesthetics of Smells and Tastes

                                                              Emily Brady

 

 

p.177

9월에 루지아나는 자연에서 부른 불길한 전갈을 받았다. 공기와 습기에 뜨거운 저항이 느껴지는, 그리고 신선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 어떤 사람의 얼굴이 증발하는 것처럼, 때론 무거운 호흡처럼 느껴졌다. 인동덩굴, 늪의 꽃, 목련류의 식물, 강의 신비한 향이 대기로 올라오고, 유기적 저속함의 잠입이 증대되었다.

 

                                                                                                                              Tom Robbins, 지르바춤의 향기

 

서론

 

냄새맡기(Sniffing)와 맛보기(Savoring)는 우리 환경에 대한 감각적인 의식에 기본적인 루트 일뿐만 아니라 Tom Robbins가 위 구절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람들, 장소, 이벤트의 특성과 성질을 정의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그들의 중요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냄새와 맛은 미학에서 무시된 주제였다. 이런 흐름은 이런 감각들이 미적인 평가의 부적절한 대상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왔으며, 또 높고 낮은 쾌 사이에서 그 특징에 따른 철학적인 유산에로 부분적으로 추적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감각들이 무시된 더 일반적인 이유는 미학에서 그리고 인간의 경험에서 더 광범위한 시각적인 것의 우세성에서부터 기원하였다. 이 쳅터에서 나는 상황들을 바르게 놓을 것을 원하며, 또 미적인 인식(평가)에서 냄새와 맛의 중요성과 그  합법성을 주장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미적인 성질들에 대해 인식될 수 있고, 또 그들은 전통적인 미적 이론들에 의해서 출발한 미적인 영역 내에서 함의의 조건들을 논의할 것이다. 그런 영역은 하이아트, 미, 자연의 장엄함으로 보존된 가운데 후각기관(olfactory)과 소화기관(gustatory) 경험을 포함하여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냄새와 맛에 대한 나의 인식이 하나의 도구적인 수준으로 가치있게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경험에서 냄새와 맛으로 우리의 환경을 이해하게 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여 방향을 잡게 하고, 우리를 관계시킨다.

 

어떤 특징들(Some Distinction) p.178

 

나는 냄새와 맛의 분석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나의 설명은 주로 Frank Sibley의 말기 긴 논문으로부터 개요를 그렸으며, 세부적인 분석은 냄새와 맛의 미학에 대한 논문에서 만날 수 있다. Sibley처럼, 나는 냄새에 주로 집중을 하였다. 맛을 보편적으로 소급하는 가운데, 더 정확하게는 냄새를 언급하였다. 냄새는 후각 신경과 더불어 조화된 코 안에 있는 수용기관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정의된다. 맛은 맛의 돌기나 혀에 있는 수용체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정의된다. 이런 물리적인 표준들에 의해서 냄새는 더 중요한 감각인데, 왜냐하면 입안으로 들어오는 우리의 감각은 후각 수용체를 통해서 지각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코는 혀보다 전형적으로 더 감각적인 수용체이며, 더군다나 냄새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 그러나 두 감각들은 또한 함께 작동한다. 우리는 두 가지 감각들 사이에서 차이점을 여전히 식별할 수 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 이것을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냄새는 코를 통해서 호흡과 냄새를 맡는 후각이며, 한편 맛은 입으로 먹고 마시며 - 맛을 보는 미감각이다.

냄새와 맛의 다른 종류들도 있다 - 밀크의 맛, 커피의 향 - 종류들 안에서 시블리는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유용한 특징을 만들고 있다. 특별한 냄새와 맛으로, 가령 특별한 커피의 맛, 특별한 사람의 땀의 냄새를 들 수 있다. 일반적인 냄새와 맛을 언급하는 “일반적인” 카테고리는 어떤 것을 연상시키며, 혹은 특별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카테고리, 예를 들어서 특별한 컵 이상의 Earl Grey 차의 맛, 땀의 일반적인 냄새 대 특별한 사람의 땀내가 있을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일반적인 카테고리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시블리와 반대로 일반적이고/특별한 특징은 바탕이 없이 논의할 수 있다. 유일한 특별한 것들도 주장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일반적인 카테고리를 창조할 수 있는 보편적인 특징들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내가 여기에서 주었던 대부분의 사례들은 냄새와 맛의 특별한 사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징은 범주적으로 홀딩할 수 없을지라도 유용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방식으로 물의 다른 맛들을 보편적으로 식별할 수 있어서 일반적인 물의 맛을 식별한다. 물의 어떤 맛은 염소로 살균하였고, 또 다른 짠맛이 있고, 여전히 물-맛을 인지할 수 있으며, 밀크-맛으로부터 물-맛을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카테고리의 사용은 물과 우유의 본질적인 맛을 수반하지 않으나 우리는 하나의 일반적인 맛을 이성적으로 동일화시킬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냄새와 맛의 본질주의를 발전시키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記述로 제안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냄새와 맛의 국면들은 쉽사리 인식될 수 있으나 그들의 본질을 어휘로 발설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감각 지각의 이런 양식들은 덜 발달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식별하기 위한 풍부한 어휘를 갖고 있지 않은 이유도 한 몫을 한다.

p.179

시블리에 의해 만들어진 두 번째 유용한 특징은 유일한 것과 혼용된 냄새와 맛 사이에 존재한다. 유일한 냄새와 맛은 단순하며, 한편 유일한 하나의 냄새와 맛은 식별될 수 있으며, 한편 하나의 냄새와 맛은 분리되어 구별되지 않으며, 차이있는 것으로 구별할 수 없다. 두 가지 사례들로 소금의 맛과 레몬의 맛이 있다. 혼용된 냄새와 맛은 합성물에 포함되고 있으며, 거기에서 하나 이상의 냄새와 맛은 식별된다. 이런 범주는 흥미롭다. 왜냐하면 코와 입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한 것의 복합성을 자리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음료 스프라이트는 세 가지 맛의 혼합물로 보이며- 레몬의 신선한 감귤류, 깨끗한 라임, 탄산수에 약간의 소금맛이다. 라즈베리 요구르트의 냄새는 라즈베리의 예리함과 요구르트의 크림향이 조화되었다. 비록 때때로 우리는 냄새와 맛의 복합적인 혼합을 동일시하는 어려움을 발견하며, 대부분 혼용된 것에 대해서 회의한다. 확실하게 다양한 혼용을 식별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어떤 포유동물은 특별한 사람의 냄새 안에서 냄새의 혼용을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아로마나 향기에서 모든 개별적인 향을 식별할 수 있으며, 어떤 기계들조차도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와 같은 특징을 만들 수 있다. 맛의 혼합물은 전반적으로 새롭고 유일한 맛을 창조할 수 있으며, 유일하고 혼합된 그래서 덜 예리한 것들 사이에 특징을 만든다.

 

미적 인식의 오브제로서 냄새와 맛을 변호하기

(Defending Smells and Taste as Objects of Aesthetic Appreciation)

 

냄새와 맛이란 주제의 어떤 아이디어와 함께 나는 철학적 미학 안에서 냄새와 맛과 대비된 가운데 상승된 반대에로 전환하고자 한다. 이런 비평들의 대부분은 Kant의 미적 이론으로 전형화한 모더니스트 전통으로부터 온다. 여기에서 나의 전략은 비록 그 전통 자체가 미적 인식의 적절한 오브제들을 너무나 협소하게 정의한다고 하더라도 냄새와 맛이 그 자체의 용어에서 이런 전통의 반대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일반적인 이유로서 냄새와 맛은 그 기초의 연상으로부터 유래하는 철학적 미학이 무시되어 왔었다. 냄새와 맛들은 육체와 비인간적인 동물들과 연관이 되며, 소위 낮은 쾌로서 생경한 영역과 연관이 되었다. 첫 번째 편견은 낮은 쾌와 높은 쾌 사이에서 한 특징을 만드는 오랜 철학적 전통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하나의 특징은 정신-육체 이원주의에 밀접하게 묶여서, 정신은 육체보다는 더 가치 있고 명확하게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낮은 쾌는 먹고, 냄새 맡고, 섹스, 그리고 다른 육체적인 기능들, 이를테면 발한(sweating)이며, 한편 소위 높은 쾌는 마음과 지성과 더불어 연상되었다. 사유의 이런 종류의 초기 근원은 플라톤이다. 예를 들어서 Phaedo에서 육체적인 쾌는 진리와 바람직한 저승을 성취하는데 하나의 방해물로 여겨졌다. 이런 아이디어는 Mill에 의해서 유명하게 지속되고 있다: “인간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낫다는 ; 즉 만족한 바보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현상학자들과 약간의 후기 모던 사유가들에 의해 육체에 대한 최근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의심없이 일상 삶의 전통에서 의심없이 지지되고 있으며, 편견은 지속되고 있다. 서구 문화의 대다수 사회는, 냄새와 맛은 낮은 쾌로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서, 냄새나는 양말은 보기 흉하고 야만적으로 고려되며 - 아마도 우리의 행동은 비인간적 동물들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것에 더 첨부해서 우리는 향기나는 향수로 땀과 같은 자연의 냄새를 가린다. 편견을 지지하는 또 다른 전통은 먹고 마시는 것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비평에 있는데, 지성적인 예술이나 혹은 감식안은 철저하고 정련된 지식과 더불어 냄새맡고 맛보는 것들을 조화한다.

냄새와 맛과 대비된 편견은 예술 세계 속에서 그 방식을 또한 발견하고 있다. 보는(sight) 것은 우리의 우세한 감각이라는 사실과 조화하여 냄새와 맛은 예술의 역사에서 이렇다 할 역할이 없었다. 정물화(still life)는 시각예술의 한 장르이며, 그 안에서 다른 감각들은 유희하지만, 여전히 명백한 시각적인 것만 있으며, 비록 약간의 어떤 사람의 입의 물만 만든다. 문학에서 후각의 서술을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며, 수많은 작가들은 냄새와 맛의 서술을 규칙적으로 사용하며 - Proust 와 Joyce는 우수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문학적 상상력은 하나의 시각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특별히 상관적인 예외가 있는데, Peter Sṻskind의 향수(perfume): The Story of a Murder는 인간의 향을 결손하고 있는 향수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그는 자신의 서거를 이끄는 냄새에 관한 특별한 감각을 가졌다. 이 소설은 그의 주변의 환경을 구성하는 후각이란 방식과 중심적인 캐릭터의 이미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향기를 사용하면서 풍부한 후각의 세계를 기술하고 있다.

다른 예술 세계에서 어떤 현대 작품들은 썩은 야채, 피, 초코렛을 포함하여 조각이나 인스톨레이션으로 감각의 사용을 확장하면서 진화하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의 현대 예술박물관은 하나의 긴 테이블에 29개의 도자기 단지로 설치를 하였는데, 각각은 다른 향기를 담고 있다. 이런 예술작품의 감상은 각각 다른 많은 냄새 맡는 것을 요구하며, 만약 당신이 좋아한다면 각 단지가 안내하는 정보를 참고하면서 각 향기를 체크하는 것이 가능하다.

낮고/높은 쾌와 대비하여 냄새와 맛을 변호하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은, 반대로 그 특징 자체가 지지할 수 없는(untenable) 어떤 것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아규먼트는 정신-육체 이원주의 안에서 진부하고 도전적인 신념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다. 한편 여기에서 내가 그와 같은 아규먼트를 제시할 수 없는 동안에, 마음의 철학 안에서 최근의 물질주의자 이론들은 마음-육체가 찟겨질 정도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적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미적 이론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천천히 진행한다. 두 개의 다른 짧은 요점들은 확립된 견해와 대비하여 약간의 진척도를 만드는 것은 충분하다. 다른 감각들은 육체의 “내키지 않는(distasteful)” 국면과 연관되어 왔다 ; 가령 보고․ 듣고․ 터치하는 것은 먹고․ 마시고․ 섹스․ 땀내기와 관련되며, 그래서 냄새와 맛에 대해서 왜 가려내는가? 한층 더 모든 육체적인 냄새와 맛은 불쾌가 아니고 : 피부는 우유와 꿀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머리는 부드럽고 신선한 냄새를 풍기고, 키스는 달콤하게 기술된다.

p.181

냄새와 맛은 소비와 욕망과 한층 밀접하며, 한층 낮은 쾌에 속한다. 이것은 감각이 무관심할 수 없다는 논의로 어떤 철학가들을 이끌었다(12). 미적인 인식에 적용할 때 무관심성은 그들이 제공하는 약간의 관심보다는 자체를 위한 대상의 미적인 성질의 관조를 명세화 한다. 명백한 방식들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소비와 관련이 되며, 우리는 가끔 우리가 즐기는 냄새와 맛 이상을 원한다. 그러나 다른 감각뿐만 아니라 냄새와 맛은 소비와 관련하여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매우 숙성된 스틸톤 치즈의 향은 그것을 소비하고자 바라는 것이 없이도 인식될 수 있다(혹은 배고품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소비하기 전에 그 순간). 와인을 단지 조금 마시고 향기를 느끼는 가운데, 와인-테스팅과 같이 후각과 미각의 인식에 따른 가장 세련된 종류 안에서 동등한 진실이 있다.

반대도 또한 진실하다. 활동으로서, 코로 들이마시고, 맛을 보는 것은 늘 인식적이지 않으며, 즉 우리는 어떤 미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감각적인 반응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운동으로 숲속을 걸으면서 즐길 수 있고, 소나무의 향기로운 향을 막연하게 주목하면서 걸을 수도 있다. 유사하게 음식들은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재빨리 소비될 때, 혹은 대화 도중에, 복잡한 테스트들에 주목하지 않고 지나갈 때도 그럴 수 있다. 다른 한편 때때로 미적인 것은 스스로를 부과한다: 하나의 냄새는 너무나 강력하여 즐겁던 즐겁지 않던 우리는 그것을 주목하기 위하여, 또는 기술하기 위하여, 판단하기 위하여 실패할 수 없다. 서양 삼나무(cedar)의 강력한 향은 숲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게 하고, 혹은 썩은 샐러드 토마토는 대화를 방해한다.

여기에서 논의된 인식적이고 비인식적인 케이스 양자는 냄새나 맛 자체를 위해 인식이 가능하도록 하며, 한편 우리는 그것의 명확한 성질에 가치를 준다. 모든 감각 지각처럼, 냄새와 맛은 지각하는 데 즐거울 수 있으며, 독특하고 흥미로운 특성들로 관조 속에서 거주하고, 인지적이고 기억적일 수 있다. 그들은 지속적이고 특색이 있는 주의력에 대한 오브제를 제공한다13).

육체와 더불어 있는 맛과 냄새의 연상은 또 다른 반대를 제공한다 - 맛과 냄새는 미적인 인식에 본질적으로 고려된 정신적인 구성요소를 결손하고 있다. 전통적인 미적 이론들은 미적인 경험이 즉각적인 감각 지각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유와 상상력과 연상되는 반성적이고 관조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을 결손한 맛과 냄새들은 단순한 감각 경험의 영역에로 좌천되고 있다14).

칸트에게서 맛과 냄새들은 “부용미(the agreeable)” 영역에로 귀속시키고 있다. 아름다움(the beautiful)과 부용미(the agreeable) 사이에 그의 특징 안에서 아름다움은 오브제의 형식이나 외모에 대한 무관심적 관조를 내포하며, 한편 부용미는 흥미를 포함하며, “감각 안에서 같은 감각”과 그리하여 그것은 무관심적이지도 않고, 또 관조적이지도 않다15). 부용미는 아름다움의 관조에 관한 상상적인 개입을 결손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적 오브제의 제한된 개념에 있다. 칸트의 견해가 가정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감각보다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적인 판단에로 부상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오브제 안에는 어떤 형식과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6). 이러한 가정은 칸트가 음악의 유일한 톤뿐만 아니라 미적 관조에서 적절한 오브제로서 유일한 색을 해고시켰을 때 더 명료해졌다. 만일 냄새와 맛이 색처럼 구조를 결손한다면 그것들은 미적 오브제의 카테고리 내에서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p.182

그러나 냄새와 맛들은 이것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미적으로 흥미롭다. 내가 첫 번째로 칸트의 주장을 표명하였듯이, 냄새와 맛은 구조를 갖지 않았다.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특별하고 일반적인 것으로서 유일하고 혼합된 냄새와 맛을 발견하였으며, 우리는 혼용되고 복합적인 냄새와 맛의 다른 성분을 식별할 수 있다. 복합성이란 수많은 후각과 미각적인 경험을 전형화한 그들의 구조적의 증거이며, Chậteau Pếtrus에 의한 Hugh Johnson의 사랑스런 기술에 의해서 설명되고 있다.

 

 

수확은 적고, 새로운 와인은 너무 어둡고 농축이 되었고 신선하게-보였던 오크는 강력한 냄새로 해서, 포도주에 대한 인상을 만들지 않았다. 1년이 지나자 그 와인은 까막가치밥의 냄새를 풍겼다. 2년이 되자 담배 끝의 모습, 그러나 그와 같은 정확한 레퍼런스는 잘못된 단순성이었다. 왜 Pếtrus는 (혹은 위대한 와인) 주의를 명령하여 구조에 대한 거의 구축적인 감각에 의해 존재하며; 반대-로 위치한 무게와 조화된 강조를 보이고.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탄닌과 그와 같 은 부드러움이 존재하는가?17)

 

대단한 냄새는 구조를 전시할 수 있다18). 향수- 우리들 다수는 매일 사용한다 - 향긋하고, 꽃향, 과일향과 같은 다른 냄새의 수를 조합하였다. 향료의 술어학은 구성적인 기술을 그렸으며, ‘어코드’ ‘노트’ ‘톤’과 같은 심포니 뮤직은 특별한 향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 “보로니아 압솔류트는 betaionone의 보랏빛 노트 안에서 기쁘고 풍요로운 오일이다. 꼭대기 노트는 신선하고, 몸체 노트는 특별히 풍요롭고 따뜻하다.”19) 로빈스의 소설에서 나오는 향수 제조자는 은유적인 서술을 통하여 향수의 향기의 복잡성을 나르고 있다.

 

Tangerine(귤과)은 꼭대기 음색(note)으로서 일을 잘한다. 그것은 재빨리 공기를 쐬지만, 자스민을 타고 완벽하게 가라앉지 않는다. 빙고 파자마 자스민의 활력이 중간 음색인 동안에 … 철로 된 마루에서 낮은 노트를 필요로 한다. bodacious 자스민 주제로 어느 정도 tangerine을 묶고 섬세하게 일으킬지라도 그곳에 앉을 수는 없다.

 

냄새와 맛의 복잡성과 구조의 최고의 증거는 검토된 인식의 행위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데, 후각과 미각의 감식안(connoisseurship)의 원리 안에 최고의 사례가 있다. 와인, 위스키, 시가 테스팅은 주제의 다양한 특성에서 취해지는 조심스런 판단의 단계를 통해서 진행된다. 위스키의 경우 색깔, 후각, 향기, 첨부적인 일반적 노트(notes)로 끝이 난다(21).

p.183

시가 테스팅은 시가의 ‘미학’, 외모, 느낌으로 시작하여 : 불키기 전의 상태, 불을 키고 나서의 상태, 향기와 길이, 맛을 본 후에 아로마와 일반적인 노트가 따라진다22). 인지 감식의 종류 안에서 명백하게 일어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판단이 만들어지는 경우를 발견하기 위하여 하이아트 속으로 냄새와 맛으로 전환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오늘 밤의 저녁을 위하여 최고의 재료를 선택하는 가운데, 매일의 틀에 박힌 길을 인식하는 가운데, 이런 인지의 종류와 용해되고 있다. 우리는 아로마의 즐거움을 발견하며, 또 다른 불쾌, 하나의 맛 흥미, 또 다른 불쾌 등. 그 때 우리는 다른 냄새와 맛 사이를 식별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을 매일의 삶에서 제시하면서 이런 선호도를 갖는다. 명백한 감식안자는 자신의 후각과 미각의 스킬을 발달시키기 위한 그와 같은 판단에 적절한 설비를 갖춘 가운데 최고의 사유와 시간을 보내며, 또는 인식이 덜 발달되었을 때는 너무나 자주 못보고 넘어간 그 의미를 유지하곤 한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우리는 미적인 판단을 하며, 얕던지 혹은 깊던지 간에 칸트와 다른 사람이 놓친 냄새와 맛에 대한 복잡성을 제시하고 있다.

부용미 안에서 냄새와 맛에 대한 칸트의 분류 뒤에 또 다른 이유가 그의 믿음 안에 있는데, 즉 단순한 감각들은 보편적인 선호도 보다는 개별적인 주제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보편적으로 믿음을 포용하고 있다 - 즉 우리는 블루베리 대 스토르베리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 보다는 예술작품에 대한 개인의 판단에 더 의구심을 갖는다는 식이다23). 그러나 만약에 냄새와 맛에 대한 합법화된 지위를 위한 나의 논의가 미적인 인식의 오브제로서 수용된다면 그것들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미적인 판단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미적인 판단의 경우에서 강력한 반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지만 그러나 최후에 우리는 이런 판단들을 공정화 할 수 있다. 우리들 대다수는 냄새와 맛의 경우에서 그와 같은 판단에 대한 공정화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비평적 어휘를 결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비평적 능력은 예리한데, 그것은 정당화를 공식화하려는 것이 가능해서 비평적 담론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와인, 음식 비평, 차-시음, 향수, 다른 스킬 활동에 관한 이미 존재하는 담론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증거가 냄새와 맛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미적인 인식 자체의 활동으로 칸트가 냄새와 맛의 인지적인 활동은 정신적인 영역을 결손하고 있다는 자신의 두 번째 주장은 틀리다고 보여준다. 아이스크림의 독특한 종류의 맛을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관조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교하면서 맛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 맛이 즐겁든지 불쾌하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 속으로 적합한 맛의 성질을 어림잡게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숙성되고 광택이 나는 부드런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맛을 소급할 때 우리는 부드러움의 개념을 그리거나 혹은 미적인 성질을 가진 다른 오브제에 대해 연상을 할 수 있다. 냄새는 과거의 특별한 시간, 장소, 경험을 가져오기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기억들은 반성적인 활동의 부분이 되었다. 커피의 평범함 아로마는 좋아하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같이 편안하게 앉아서 있던 릴렉싱한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한다.

p.184

쾌와 불쾌에 대한 근본적인 감정들은 냄새와 맛에 대한 미적인 반응의 명백한 부분이다. 그러나 정서는 생각을 내포하며, 후각과 미각의 인식에로 (문지방에 들어) 가는 것이다. 냄새와 맛은 규칙적으로 정서적인 각성을 내포하며, 적어도 시각적인 것에 대한 미적인 반응보다도 더 자주 그리고 가끔 그러하다.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즐기는 누군가에게 불타는, 탄소연기의 배출은 차 문화의 유행 속에서 당황과 염오의 감정을 일깨운다. 차가 담긴 따뜻한 컵은 어떤 사람에게 릴렉스하고 안전한 감정을 만든다. 반대로, 스컹크의 사향 냄새는 인간에게 공포를 야기하고(지독한 냄새 속에 감싸고 있는 존재의 유일한 공포)

최종적인 객관성은, 칸트에 대한 나의 논의 안에서 이미 제안하고 있는 데, 즉 냄새와 맛은 미적인 오브제로서 쉽사리 명시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감각들 가운데서 냄새를 맡는 것과 맛을 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한순간의(fleeting) 경험이라는 것이다. 냄새는 한 순간에 오고 가고, 맛은 음식이 소비되는 후에 곧 떠난다. 이런 사실을 예술 오브제와 비교했을 때 예술 오브제는 더 영구하다는 점이다: 회화는 수년 동안에 갤러리의 벽 위에 있으며, 누군가의 레저에서 관조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조차도 재방문해야 하며, 비디오의 시대에서도 우리는 조심스런 미적인 주의를 위하여 영화의 부분들을 결빙-프레임 할 수 있다.

비록 냄새와 맛이 갤러리에 있으면서 더 전통적인 오브제와 같지 않더라도 요점은 이미 반성의 역할과 상상력에 관해서 이미 논의된 바, 정서는 냄새와 맛이 미적인 인식의 주제가 될 수 있게 충분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냄새와 맛을 동일시하고, 개별화 하고, 선택하고, 재방문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다른 미적인 오브제들만큼 지속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은 배치될 수 있고 상술할 수 있다. 게다가 소리와 같은 다른 감각들이 너무나 한순간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미적인 인식에 대한 가치있는 오브제가 되도록 그들 간의 조화를 고려하고 있다. 미적인-오브제의 반대는 미적인 오브제의 본질에 관한 한층 구식의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하나의 미적인 오브제가 일시적이지 않다면 당시 이런 견해에 입각해서 어떻게 자연 환경이 적절하게 미적으로 인지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사물들 중에 하나는 너무나 풍요롭고 극적으로 환경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부여하는데, 그들 중에 바로 일시적인 성질들이 있으니, 가령 날씨의 변화, 빛, 성장과 부패의 결과들이 있다.

냄새와 맛은 미적인 인식의 오브제로서 고려해야 하는 엄격한 모더니스트 기준과 만난다. 모더니즘을 넘어 비평적으로 움직이는 어떤 현대 미학자들은 미적인 인식의 중요한 모습은 인지(cognition)라고 논하고 있다. 수많은 현대 예술작품들은 감각적이고 형식적인 평가보다는 개념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냄새와 맛은 이런 새로운 조건(상태)과 만날 수 있으며, 이런 견해가 보여주는 것은, 그들은 내용을 결손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넘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해석에 대한 의미가 없을 수 있다25). 내가 보여준 것처럼, 정서적이고 상상적인 연상들은 후각과 미각의 경험을 수반하지만 지각의 이런 종류들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캐롤린 코즈마이어(Carolyn Korsmeyer)는 냄새와 맛은 그들의 인식을 통해서 발견하는 통찰력과 의미의 덕택으로 미적인 오브제로서 일차적으로 가치를 갖는다고 논의한다 ; 단순한 감각적인 오브제들 이상으로, 냄새와 맛은 또한 장식적이다. 예를 들어서, 거대한 축제의 의식적인 세팅에서 음식들은 명백한 사례들이지만, 우리는 또한 일상의 인식 안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음식의 틀에 박힌 사용은 어떤 경험적 속성을 주는 것일 수 있다. 치킨 수프는 문화의 다층에 서 질병을 위한 가정 치료제로 알려졌다. 이 부분에 대한 약간의 의학적 근거가 있다.… 그와 같이 경감하는 모습들은 수프의 즉각적인 경험의 부분은 아니지만 그러나 “진정시키는” 그리고 “안정시키는”과 같은 표현적인 특성과 더 관련이 있으며, 치킨 수프에 확대되어 있다. 그래서 돌보아 주는 의미와 가정 진정제라는 바로 그 사실이다26).

 

코즈마이어의 아규먼트의 가치는 이중성을 띈다. 첫째로, 냄새와 맛의 인지적인 가치를 위한 약간의 훌륭한 이유를 들어 시작하였으며, 냄새와 맛이 적절한 미적 오브제임을 수용하여 또 다른 이유를 제공하였다; 두 번째는 냄새와 맛은 도구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보여주었다. 다음 쳅터에서 나는 냄새와 맛은 가치있는 매일의 근원(원천)들로서 특별한 인지적인 가치로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환경 안에서 우리를 위치지우는 방식임을 보여주려 한다.

 

일상 삶에서 냄새와 맛(Smells and Taste in Everyday Life)

 

일상의 삶에서 후각과 미각의 경험은 우리 환경에서 두 가지 감각 차원을 구성시킨다. 그들은 환경 안에서 우리를 자리잡게 하고, 동시에 환경의 다양한 부분에 우리를 방향짓게 한다. 더글라스 포르테우스(J. Douglas Porteous)는 보는 것과 냄새에 대한 비교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보는 것은 오브제로부터 우리를 명백히 떨어지게 한다. 우리는 회화에서 그리고 카메라 렌즈에 서 ‘보는 것’을 구성한다; 지성적인 응답의 가능성은 고려해볼만 하다. 대비하여 냄새는 에어싼다. 그들은 육체를 관통하며, 즉각적인 에어쌈으로 스며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강력한 감정을 내포시키는 경향이 있다.

 

포르테우스는 장소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냄새의 의미를 논의하며 진행하였다.

 

스멜스케이프(smellscape)의 개념은 시각적인 인상과 같다. 냄새는 공간적으로 질서있고, 장소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스멜스케이프의 개념화는 인지되어야 하는데, 즉 지각된 스멜스케이프는 비-지속적이며 공간에서 파편화되었고, 시간에서는 삽화적(episodic)이며, 냄새가 떠나기를 꾸물거리는 곳에서 바닥으로부터 우리의 코의 높이까지 한계가 정해져 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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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의 비영속성에도 불구하고, 냄새는 우리를 에어싼다. 냄새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는 가운데 장소와 상황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미적인 방향성의 특별한 종류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해석하고 이해한다. 이런 방향성은 후각 지도로서 장소와 포커스에 따라서 변화하며, 다양하게 중첩되는 레벨을 가지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차례로 논의할 것이다.

익숙함과 인지될 수 있는 냄새는 하나의 환경 안에서 우리를 길들이는 열쇠이며, 가정에서 편하게 느끼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규칙적으로 경험하는 냄새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익숙하게 하고, 재빠르게 채택하게 하는 진실이다. 사람과 집의 냄새, 혹은 도시의 냄새를 비롯한 모든 냄새들은 더 이상 그들을 주목하지 않게 하는 익숙한 것이 된다. 사실상 우리는 장소의 감각에 대한 감정 안에서 결정적으로 남아있는 사실을 덮은 그들을 보지 않는다. 잠시 동안에 사람과 장소로부터 온 그 냄새들은 당신이 돌아왔을 때 더 잘 보이며, 가정에서 존재의 감정을 표시하며, 혹은 다른 맥락에서 익숙함에 위안이 되는 감정을 표시한다. 냄새를 통한 그와 같은 익숙함은 장소의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익숙함의 반대 면은 낯설음이다. 냄새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 냄새는 우리로 하여금 낯설고 위험하다고 경계하고, 우리로 하여금 장소에서 이방인으로 느끼게 한다29). 새 집과 다른 이상한 장소들은 차이가 나는 새로운 냄새들을 가지고 있다. 가끔 낯선 것에서, 가령 처음으로 경험하는 어떤 것의 신선함에서 즐거움이 있다. 덜 즐겁지만 냄새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주변에서 문제를 발견하게 하며, - 가령 가스 누출의 유황 냄새, 연기에서 오는 질식할 것 같은 냄새, 썩은 음식의 냄새와 맛, 그리고 질병과 죽음의 고약한 냄새30)를 들 수 있다. 프랑스 사회에서 냄새와 관련하여 조명된 역사에서 18세기 알랭 코빈(Alain Corbin) 도시는 도시 중심에서 수집된 배설물 통의 공포가 있다. 악취의 근원은 매우 익숙한 어떤 것이었으며, 아직까지 대단한 양에서 그것은 이상하고, 해롭고, 또 공포스러운 것으로 알려졌다:

 

 

Thouret는 공기와 태양에 노출되면 배설물은 Montfaucon 독이 없는 대야 안에서 퍼진다고 적고 있다. 즉 냄새에 의한 변형으로 증명되었다. 만약에 늙은 배설물이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면, 그것은 부패와 재구성의 상호작용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음식, 그리고 우리의 설비로부터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향기를 잃은 것이다. 그것은 부패된 것이다 31).

 

우리는 불쾌한 향이 있는 사물들로부터 떨어지고, 유쾌한 향이 있는 사물들에는 전형적으로 매료된다. 때때로 이런 반응은 즉각적이며 - 어떤 냄새는 거의 부패된 것의 냄새로서 역겹다(가을 잎은 향수가 있는 예외). 냄새의 근원에 할당하는 부정적인 가치는 즉각적인 반응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가 후각의 경험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후각의 근원에 관하여 알거나 그들과 연상을 함으로써 그러하다. 동물부패의 냄새는 불쾌하고 어느 정도 낯설다. 왜냐하면 그 냄새는 죽음을 연상시키고, 그래서 그 냄새에 대한 공포는 피하고 싶어한다(하나의 공포는 알려지지 않은 공포에 의해서 지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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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와 맛의 의미는 우리가 그들에 관하여 만드는 판단과 밀접하게 묶여있으며, 그리고 환경 안에서 우리는 그들을 발견한다. 이런 방식으로 냄새와 맛은 우리의 환경 안에서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바, 우리의 선호와 비선호를 결정하는 어떤 역할을 연출한다.

냄새와 맛의 익숙함과 낯설음은 우리가 환경의 국면을 인지하고, 일치시키기 위한 감각들을 사용하는 우리의 능력에 기여한다. 우리의 다른 감각들을 따라 냄새는 우리로 하여금 전체 환경과 특별한 환경에 대상들을 개별화 하고, 또 일치시킨다. 나는 두 개의 유사한 목욕 타올 사이에서 차잇점을 말할 수 있다 - 하나는 깨끗하고, 다른 하나는 더럽다 - 그들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냄새 안에서 있는 대비에 의해서이다. 집밖으로 나가면, 하나의 기본적인 길로서 도시는 전원과 구별이 되는데, 이는 각자에 의해서 연상되는 다른 냄새로 인해서 그렇다. 도시에는 안개의 짙은 냄새가 있으며, 포장도로에 비가 내리면 땅의 냄새와 배출의 유독한 냄새가 난다. 지방에서는 새로 벤 건초의 초록 냄새가 나고, 자극적인 향, 비료의 달콤한 냄새, 불타는 숲의 향료 냄새도 있다. 냄새와 맛에 대한 각자의 동일화(정체성)는 전반적으로 특별한 환경과 우리의 환경 안에서 사물들을 이해하는 가운데 하나의 서술을 제공한다.

문학의 근원으로 한 번 더 가보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다양한 소설에서 감각적인 서술을 통하여 더블린(Dublin)과 같은 도시장소의 풍부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후각과 미각적인 성질들은 <율리시즈(Ulysses)>의 두 중요 인물인 Stephen Dedalus와 Leopold Bloom이 일상 삶에서 방문했던 장소의 친밀한 감정을 일깨워 주고 있다. 미각적인 성질은 그의 틀에 박힌 Bloom의 캐릭터에 특히 의미가 있다. Bloom이 Davy Byrne의 레스토랑에 방문하자 그곳에서 그의 경험에 따른 쾌와 불쾌에 대한 어슬렁거리는 세부적인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미스터 Bloom은 그린 치즈의 풍미, 자극적인 머스타드의 혐오스런 풍미, 신선한 깨끗한 빵, 줄 무늬가 있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부드런 약간의 와인을 목에 넘기고, 로그우드 나무는 없다. 한기가 떨어져 나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맛을 느낀다32).

 

그는 “동물과 큰 닭의 내장 기관”에 대한 특별한 선호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들 중 대부분을 그는 그릴에 구운 양의 콩팥을 특히 좋아하여 자신의 큰 접씨에 담아서 희미한 향이 나는 오줌에 저려 훌륭한 톡 쏘는 맛을 즐겼다33). Bloom은 자신의 와이프의 향과 더불어 살았으며, 자신에 관해서 방랑을 하였다 - 자신과 그녀와의 관계에서 그녀를 일치시키는 방식이었다34).

냄새와 맛은 문화적으로 다른 장소를 이해하는데서 의미성을 가지고 있다. 후각의 지각에서 문화적으로 차이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약간의 증거가 있다. 즉 특별한 문화와 연관되는 것은 냄새와 맛의 다양성과 관련되었다. 폴 로드웨이(Paul Rodaway)는 하나의 도시 세팅에서 이것과 관련된 명확한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인 아랍 도시의 오래된 지역의 공적인 공간 - 가령 Marrakech, Fes, Kairouan과 특히 아랍시의 석 마켓 지역- 모던 서구 도시보다 풍부한 긍정적 스멜스케이프를 가지고 있다. 뉴욕과 런던의 도시 거리는 교통매연이라는 아주 부정적 스맬스케이프를 가지고 있으며, 한편 문 닫은 쇼핑몰, 백화점은 상대적으로 향기가 없는 지역과 자극적인 단계의 스맬스케이프의 혼합 이며, 마치 아름다운 제품들의 향수 판매대처럼 그렇다. 전통적인 아랍 souk, 좁은 통로의 미궁, 작은 광장, 매장, 공방은 판매하는 제품들의 풍부한 향을 가지고 있으며, - 가령 살아있는 동물부터 가죽과 의복까지 - 그리고 이런 냄새들은 위대한 자유분방과 함께 혼합이 된 듯하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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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그리고 맛)는 일상의 경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각(어느 정도 맛)은 우리 자신보다는 문화 안에서 장소와 사람들을 일치시키거나 인지하는데 기여한다. 하나의 불운하고 때때로 불길한 함축은 인종상의 그리고 민족 특유의 틀에 박힌 형식화로 이끈다.

계급들은 후각의 범주에 의해서 대단히 구별되어 왔다. 조오지 오렐(George Orwell)의 에세이는 이 세기의 북 영국의 초기 노동계급의 피고용과 빈곤을 다룬 <위간 피에르의 길(The Road to Wigan Pier)>은 석탄 광촌에서 작업하는 나날의 삶의 더러움과 궁핍의 강력한 이미지를 일깨운다. 오웰은 “낮은 계급의 냄새”에 대한 일반적 신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자신의 논평을 표명하고 있다. 오웰은 계급의 특징적인 심장부에 있는 신념으로서, 기초적인 물리적 감정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란 방식을 주면서 논의하고 있다. 비록 낮은 계급들이 실제로 냄새를 맡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압박에 기여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선천적인 더러움을 믿기 때문이라는 신념이다36). 이것은 매일의 삶에 대한 냄새의 중심부를 지적하며, 냄새가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취급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일하고, 어떻게 목욕을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삶의 상황과 조건을 드러낸다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우리 코의 현저한 방식은 후각의 기억을 통해서 인지와 검증을 용이하게 한다. 기억의 영역은 특히 건장하며 지속적이고, 많은 생리학적 이론들은 우리의 기억이 눈을 통해서 보다는 코를 통해서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며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후각은 뇌의 개념적 부분이나 신피질을 우회하며, 한편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 결과 향기와 관련된 기억은 더 즉각적이며, 그래서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관련된 기억들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소급된다37). 현재에 어떤 시간에 냄새를 인지하는 우리의 능력은 냄새에 대한 일반적인 카테고리에서 과거의 경험을 가진 것에 의존한다.

현재에, 우리가 살고 일하는 장소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은 냄새로부터 온다. 다음과 같은 냄새를 고려해보자. 집에서: 부엌- 따뜻한 베이킹 브래드, 풍부한 붉은 고기, 개스 오븐, 지방; 목욕탕- 비누, 향수, 광주리, 물이다. 협회 : 도서관- 먼지, 가죽; 병원- 날카로운 소독제, 위생적인 표면, 질병, 소변이 있다. 자연스런 환경들 : 바다- 소금, 생선, 태양에-그슬린 모래; 산- 이끼, 차가운 돌, 어두운 대지, 신선한 이파리들.

이런 사례들은 어떻게 해서 후각 기억이 환경의 타입과 연상하여 냄새를 인지하고 회고를 조정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 바로 독특한 기억들을 소급하기 위한 특별한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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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불기(whiff)는 과거로부터 한 순간 속으로 인지의 문을 제공한다. 나의 최고로 강력한 후각 기억중의 하나는 특별한 해초비누를 통해서 온다. 그 냄새는 모래, 소금, 그리고 부패한 바다해초로 이루어졌으며, 나로 하여금 아무 걱정이 없었던 노스 캐롤리나 해변에서 여름을 보냈던 유년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후각 기억에 대한 정서적 성질은 아주 강력할 수 있다;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다른 기억들과 더불어 전형적으로 센티멘탈하고 향수적이며, 의기소침한 감정을 떠나있다. 후각 기억은 시간의 순간과 범위를 상기시키며, 냄새 경험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활동은 우리 환경에 대한 방향성을 지시하는 더욱 유동적인 참조를 제공한다. 특별한 냄새는 우리의 삶에서 특별한 시간과 더불어 연상되며, 가령 그 해, 그 날의 시간과 더불은 냄새이다. 아침은 잔디 위 이슬의 달콤한 냄새이며; 겨울은 단단하나 부서지기 쉬운 하얀 향이 있는 다른 냄새로 덮인 눈의 냄새이다.

나의 논의의 대부분은 환경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아이디어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며, 냄새와 맛에 대한 유사한 환경적인 역할은 환경의 가장 친근함에 적용된다. 냄새와 아마도 맛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인지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준다. 인간이 육체의 냄새를 가진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냄새는 얼굴과 겨드랑이에 포함된, 그리고 육체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되는 아포크린 선(apocrine glad)에서 기원한다. 머리의 지방은 냄새를 흡수하며, 우리는 육체의 냄새에 영향을 받으면서 먹는다(거무스런 여성들은 붉은 머리 여성들과는 다른 냄새에 대해서 말하고, 고기먹는 사람들은 야채만 먹는 사람과 다르다)38). 육체적인 냄새의 범위와 변화 때문에 우리가 특히 잘 알고 있는, 특별한 사람의 냄새를 인지할 수 있음에 대해서 놀랄 일은 아니며, 유일한 냄새의 증거에 근거하여 그들의 습관에 관해서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후각 지각이 없고, ‘무후각증(anosmia)’이라서 음식의 쾌락과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한 냄새를 고통스럽게 놓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 다른 사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 속에서 냄새와 맛의 경험은 상호작용(reciprocity)의 관계를 내포한다. 또 다른 감각으로서 터치는 이것에 대한 가장 가까운 경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터치하는 것이 무언지에 따라서 당신이 돌아섰을 때 무언가가 당신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맛은 터치를 포함하는데, 우리가 음식을 놓을 때, 혹은 우리의 입속에서 다른 사물이 있을 때도 그렇다. 다른 것들에 밀접하게 가까울 때 우리는 그들의 향기를 맡고, 그들은 우리의 향기를 맡는다. 이 주제에서 칸트의 견해는 실망스럽게도 협소하지만, 그들의 점잔빼는 것(prudishness)에서는 아마도 일관적이다. 냄새는 감각들 중에서 가장 소모적이며,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냄새가 불쾌하기 때문에, 냄새들은 사물로부터 우리를 저항하게 한다고 논의한다. 그는 맛을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가운데 사회성”39)을 조장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회적인 감각으로서 취미의 중요성에 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냄새에 대한 감싸는 특징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상호작용을 조장하는 잠재성은 이런 감각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 사이에서 특별한 감각상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한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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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개별성은 자신들의 환경 안에서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스스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각 개인의 육체의 후각 지도는 육체적인 지식의 한 영역을 구성하며, 우리 자신의 육체의 지역을 도표로 만드는데 기본적이다. 우리 자신의 냄새를 길들이는데(habituation)는 우리가 이 냄새를 명백히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변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때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명료히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에서 익숙하지 않은 냄새는 우리가 먹는 어떤 것과 연관이 있으며, 또는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질병이나 병으로 인해서이다. 우리의 육체에서 나는 낯설고 새로운 냄새는 우리가 아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혼란스럽게 한다.

개인적인 스타일은 어느 정도 후각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시각적인 방식에서 스스로 만드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의 얼굴을 메이컵하고, 보석으로 장식하고, 옷을 선택하고, 우리가 맞이하고 목적하는 몸을 만든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방식의 의식만큼 스스로 보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대단한 방식으로 냄새는 기능하다. 한 사람의 개인적 스타일은 좋아하는 향수로 창조하며, 우리는 우리의 육체에서 나는 냄새인 땀과 마늘 향을 우리나 다른 사람이 선호하는 향으로 커버할 수 있다.

 

결론

 

나는 왜 냄새와 맛이 미학의 주제 안에서 포함되어야 하는지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냄새와 맛은 자신의 권리 안에서 감상의 가치가 있으나, 그들은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우리의 환경 안에서 우리에게 방향이 주어졌고, 우리가 그것 안에서 발견하는 가치와 의미에 기여한다. 환경 미학에서 미적인 감수성은 예술 갤러리의 벽위에 한계를 넘어서 도달하고, 미적인 감상에서 시각적인 독점성의 한계를 초월하도록 의존하고 있다. 환경미학은 모든 감각을 사용하면서 탐구하고 있다. 만일에 미적인 감수성을 발전시킨다면 갤러리는 훌륭한 활동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각과 미각의 지각 안에서 숙련한다는 것은 이것의 분야가 될 것이다. 나는 약간의 방식을 제안함으로써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즉 우리는 미적인 인식 안에서 이런 감각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첫 번째로, 미적으로 감각적이다: 노력하고, 휴식 관례, 당신의 음식을 냄새 맡고, 친구의 냄새를 맛보고, 당신이 누군가의 냄새를 맡은 것을 서술한다. 실천은 그들에게서 냄새와 조화를 일치시키고;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을 때 양념들을 추측하도록 노력해보라. 미적인 감수성은 하나의 스킬이며, 어떤 스킬과 같아서 발전시키는 습관과 실천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로 냄새와 맛의 어휘를 조성한다. 이런 어휘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아주 빈약하나, 우리가 경험한 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새로운 감각적 세계를 열 수 있는 어휘를 갖는 것이다. Porteous는 이것을 할 수 있는 약간의 유용한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랜드스케이프 대신에 스멜스케이프, 테이스트스케이프를 탐구하고 기술해보라. 냄새 이벤트와 냄새 마크를 기술해보라. 목격자(eyewitness) 대신에 후각자(nosewitness)의 역할을 유희하는 가운데 그 방식을 논의하라. 풍문(hearsay) 대신에 후문(nosesay)의 아이디어를 탐구하라. 코-훈련 실천과 당신이 발견한 것을 서술하는 노고를 하라. 일반적으로 시각적인 용어들을 피하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냄새와 맛의 이벤트를 기술하도록 노력하라. 냄새를 위한 미적인 감수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어떤 실제적인 유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일상의 환경 안에서 더 친근한 미적인 경험의 가능성과 그 안에서 더한 의미를 발견하려는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