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명화 읽기

렘브란트 작품 읽기

박연실 2016. 10. 31. 15:25

안녕하세요? '표현으로서의 예술' 편에서 렘브란트와 루벤스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수업시간에는 반 고흐 작품만 보았어요.

충분한 시간이 없었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내용의 맥락상 연결될 수 있는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한 두 작품씩 같이 보기로 하죠.

 

우선 렘브란트(1606-1669)의 대표적 작품 <밧세바, 1654>를 보죠.

 

 

 

  밧세바, 1654, 141x 141cm, 루브르 미술관

 

 

 

 

어느날 저녁, 다윗 왕이 왕궁의 주변을 산책을 하는데, 열려진 창문 사이에로 향긋한 비누냄새가 흘러나와 다윗 왕의 코를 달콤하게 자극하였다.

향긋한 향을 따라 문틈을 들여다 보니 백옥 같은 하얀 피부를 드러낸 여인이 목욕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혼비백산한 다윗은 자신이 목격한 집의 여인네를 부하를 통해서

알아보니,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였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장에 있는 동안에 밧세바를 자신의 처소에 불러들이라는 명을 내린다.

목욕을 하고, 다윗 왕의 쪽지를  들고서 상념에 잠겨있는 밧세바를 렘브란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발치에서는 하녀가 그녀의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밧세바의 모델은 렘브란트의 두 번째 부인인 헨드리케에이다.

렘브란트는 순수하면서도 죄인으로서 절망적 상황에 처한 여인을 한결같이 간결하고 탁월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모든 상황들이 아름다움과 운명에 거역하지 못하고, 끝내는 밧세바의 순종을 그리면서도 그녀의 내면의 갈등이 내려간 눈커풀과 눈섭에서 잘 드러난다. 

일부 평론가들은 "요부를 고뇌하는 여인상으로 그렸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고, 우리아를 본인의 아내와 동침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우리아는 "자신의 부하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이는데, 아내와 편안하게 동침하는 부분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낀다"는 변명을 하며 거절하였다. 화가 난 다윗은 우리아를 전투가 치열한 전투장에 파견하여 목숨을 잃게 하였으며, 이윽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는 솔로몬이 탄생되고, 영광스런 왕위를 계승한다.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을 렘브란트는 멋진 그림 <밧세바>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53세의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예요.

 

 

 

 렘브란트 자화상, 1659

 

 

 

렘브란트가 53세 때 그린 자화상이네요. 전문가로서 원숙한 눈빛과 풍모, 그리고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죠?

렘브란트는 바로크(Baroque) 시대, 즉 16C 말 이후 18C초까지의 유럽의 미술사상에 속하는 시대에 활약하였으며, 이 때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튼이 등장한 과학시대 이기도 하였다. 특히 뉴튼은 만유인력을 비롯한 물리학자로서의 가시광선을 발견하여 색채학의 전면기를 맞이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 때에 렘브란트는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수단을 창출하여 빛과 그림자에 대한 격렬하고 비약적인 대조를 사용하는 스타일을 보였다.

평론가들은 "과도한 어둠이 있는 밝음" 혹은 "신비와 침묵이 그의 화필에서 나왔다"는 평을 하였으며, 그에게 손의 힘은 눈의 힘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명암의 단계적 변화를 통해 분위기, 성격, 감정을 전달함으로써 '명암 대조법'에서 최고봉을 이룬다.

 

 

 

22세 때의 자화상, 1628.

 

 

위의 작품을 보고 괴테는, "꿈이 없는 청춘은 시체나 다름 없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감회를 기술한 바 있으며, 이윽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저작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통상 한국에서 22세면 대학시절이며, 아무런 기약이 없는 방황의 시절로서 어떤 분야에든 정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시기이기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속에 모습은 덥수룩한 머리와 풍만한 목선과 체격이 실루엣으로 보이며, 그 안에 이목구비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밝은 빛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에 비해 어둠 속에 있으면 모호하고 비선명한 특징을 띈다. 렘브란트가, 젊은 시절의 방황하는 혹은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불안한 내면 심리를 자화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훨씬 뒤인  1662년에는 <제욱시스로 변한 자화상>을 통해서 화가로서의 롤 모델인 그리스의 제욱시스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포도를 그리면 너무나 리얼해서 새들이 날라와 포도를 쪼아 먹었다는 그 일화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미술경연 대회, 또 헬렌을 그린 제욱시스의 작품들을 학습한 바 있다. 모든 화가들의 롤 모델일 될 수 있는 전설 속의 제욱시스의 모습을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에서 그 이미지를 담아 놓고 있다.

 

 

 

 

제욱시스로 변신한 렘브란트, 1662

 

 

 

 

 

 

  가니메데(Ganymede)의 납치

 

 

 

제우스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어린 가니메데를 납치하는 장면이다. 렘브란트는 어린 가니메데로 표현함으로써 제우스의 휘하에서 성장하는 많은 세월을 암시하는 것 같다.

어린 청소년으로서 특출난 미모를 자랑하는 가니메데는 이후 제우스의 술시중 및 젊은 남성과의 동성애를 즐기면서 평생 모셨다고 전해진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163 x 216cm

 

 

 

처음으로 집단 초상화의 제작을 의뢰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Vesalius의 해부학 저서를 참고로 전완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툴프 박사가 수업하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의 외과 의상 조합이 주문한 것이다. 툴프 박사는 시체의 왼쪽 팔을 절개하여 힘줄을 보여주고, 왼손으로는 손가락의 수축과 움직임을 흉내내고 있다. 해부학적인 정확성으로 볼 때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직접 해부하는 장면을 관찰한 다음 그렸음으로 판단된다.

렘브란트는 움직임에 대한 몸의 근육과 골절에 대한 관심이 늘 있었고, 레오나르드나 미켈란젤로 만큼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해 선행 연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으로 세계 제일의 번영을 자랑하고 잇었다. 그런 버블 경기 속에서 암스테르담 부자들은 모두 다 서로 주문한 그림이 '집단 초상화'형식을 띄고 있다.

 

다음 감상할 작품은 <야경, 1642>이다.

 

 

 

 

 

야경(Nighr Watch(The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 1642, 365 x 438cm, 암스테르담 라익스 미술관

 

 

 

렘브란트는 대장 바니코크와 그의 대원들로부터 실물크기의 집단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클로베니르스 둘렌(Kloveniersdoelen)의 저택에서 옮기면서 그 일부가 절단되었다. 이 작품은 생동감 있는 자연스런 화면 구성에 강한 명암대비로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두 인물이 관객의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얼굴의 생김새, 표정, 동작이 빛 속에서 관찰된다.

  원래 이 작품은 위에 덮혀있는 유약 때문에 <야간 순찰대>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유약 제거 작업 이후, 중앙에 있는 실제보다 약간 큰 덩치의 대장이 부대원들에게 행진명령을 내리는 순간을 담은 대낮의 장면으로 밝혀졌다.

집단 초상화로서 38명의 성인과 3명의 어린이가 등장한다.

 

끝으로 감상할 작품은 <돌아온 탕아, 1669>이다.

 

 

 

 

돌아온 탕아, 1669

 

 

 

젊은 시절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온 탕아가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재회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들을 품고 있는 아버지의 두 눈은 촛점이 없어, 그 동안  눈물로 지세우며, 기다린 세월을 반영하듯 눈이 먼 아버지는 아들을  마음의 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들을 품은 아버지의 두 손을 한손은 남자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자의 손으로 그렸다. 용서의 의미로 렘브란트는 여성성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신약성서 누가볶음 15장을 참고로 하여 그린 작품이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화가답게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은 빛이 가득한 모델링으로, 그 외 인물을 반영한 배경은 어둠 속에 묻혀 그려놓고 있다.

렘브란트의 말년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