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명화 읽기

표현으로서 예술 - 반 고흐 작품 감상

박연실 2016. 10. 19. 21:03

안녕하세요? 마치코 입니다.

 

콜링우드와 크로체의 이론에 따라 감상하게 될 반 고흐 작품을 올립니다.

반 고흐는 1880년부터 1890년까지 10년 동안에 드로잉 1100여 점과 회화 900여 점을 완성합니다. 그는 정신질환의 일종인 측두엽의 기능장애로 권총으로 자살하고, 11년 후인 1901년 파리에서 71점의 작품을 전시하고, 사후 명성을 얻게된 생전에 불운했던 화가이죠.

 

 

반 고흐, 까마귀가 날으는 밀밭, 1890, 50.5 x 100.5 cm

 


 

앞서 얘기하였지만,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표현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 때 표현은 감정과 연관되는 표현의 전달문제로 정의하고 있네요.

즉 상대가 감정의 표현을 제대로 하면, 그것을 보는 청자나 관자는 그가 한 표현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공감을 할 경우에만 예술로 인정하고, 그 때 상대를 훌륭한 예술가로 본다는 견해입니다. 이는 톨스토이가 살았을 당시의 러시아 혁명이 극에 달해, 한 슬로건으로 러시아 국민의 대동단결을 할 필요가 있는 19세기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어 톨스토이로 하여금 그런 예술론을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콜링우드는 톨스토이가 주장한 그런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기예에 불과하다면서 예술이 정치적인 상황에 이용된다는 우려를 표명하면서, 자신의 저서 『예술의 원리』에서 예술의 정의를 이렇게 합니다. 즉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기는 하데, 감정의 전달이 아니라 '감정의 정리'라는 이론입니다.

콜링우드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catharsis 이론은 정화(purgation)와 더불은 정리(clariification)이론이 있는데, 콜링우드의 이론은 이 후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감정의 표현을 자신에게 하던 혹은 타자에게 하던 그 모호했던 감정의 정체를 깨닫고, 감정의 실체를 파악했다면, 궂이 자기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상대에게 전달하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논자가 그런 콜링우드의 이론에 적합한 작품사례로 고흐의 작품을 든 것은, 고흐가 살았을 당시에 고흐가 표현한 작품이 대중에게 공감을 주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고흐는 자신에게 내재된 감정들을 1880~90년에 걸친 10년 동안에 화폭에 쏫아놓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고흐가 살았을 당시에 고흐의 작품들은 톨스토이의 이론에 따라면, 예술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특정 감정의 전달을 할 수 없어서 공감을 사지 못하고 외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흐 자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작품활동을 통해서 자기 안에 내재된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두 화폭에 표현되었을 것으로 봐서 개인적인 감정의 정리는 실현되지 않았을까? 하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콜링우드의 이론에 따르면 충분한 예술가로서 예술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감정들을 들여다 볼까요? 

 

위의 작품은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던 반 고흐는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 발견되어 숙소로 옮겨졌으나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고 하네요.  불길해 보이는 까마귀 떼가 폭풍우 치는 하늘과 밀밭을 배경으로 날고 있습니다. 거센 폭풍우는 고흐의 내면 심리로 파고들어 이미 이성을 마비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추수를 앞둔 평온한 농가의 논밭에서 자연의 거센 폭풍과 까마귀의 고성이 정리해놓은 질서들을 휘갈기듯 난잡한 상황으로 휘몰아 쳤음으로 보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감자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가 애착을 갖고 완성한 작품으로 스스로 최대의 걸작이란 호평을 한 바 있다. 빠듯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여러 명의 모델들을 고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이후론 모델료의 지불에 따른 고충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을 한 작품에 그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작품에서 보듯이, 그닥 밝지 않은 호롱불 밑에서 한가족이 감자를 먹고 있는데, 또 다른 가족이 식사 때에 방문하여, 같이 감자를 권하는 장면이다. 대지에 기대어 살면서 그들이 수확한 결실인 감자를 주식으로 먹고 있는 남루한 농부들의 삶을 그렸다. 그러나 당대의 고흐 주변의 화가들과 고흐 아버지까지도 "그림이 어둡고 우중충하다"는 혹평에 고흐는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답변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고흐가 살았을 당시에 주목받는 화풍은 고전주의 화풍으로써 아름답고, 선하며, 공명정대한 이성이 지배하는 예술관이었으므로 평단과 미술계로부터 외면당하였을 것은 물 보듯이 뻔하다. 그리고 반 고흐는 이렇다 할 아카데믹한 화풍을 교육받지 못한 화가로서 그의 선배격인 렘브란트, 프란츠 할스, 들라크로와, 밀레의 화풍을 관찰하며, 연습하는 임화의 숙련을 쌓은 독학의 화가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은 <정오의 휴식, 1889>이란 작품이다.

 

 

 

 <정오의 휴식>, 1889

 

 

역시 농부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노동을 마치고 편안한 정오를 휴식하며 낮잠 자는 부부의 모습이다. 옆에는 벗어놓은 신발과 두 그루의 낫이 보인다. 

멀리서는 이들이 타고 왔을 마차와 말이 서있다. 한낮의 햇살을 가리는 모자를 걸친 남편이 반듯하게 누워잇고, 그 옆에는 남편에 기대어 모로 누운 아내의 모습이 상당히 순종적으로 보인다. 수건을 두른채 온정히 마음과 육체를 남편에게 기댄 여인네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본래 프랑스와 밀레의 작품을 보고, 완성한 임화형식이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또 예술가로서 선배화가를 존경하였다.

 

그럼 밀레의 오리지널 작품을 보자.

 

 

장 프랑스와 밀레, <정오의 휴식>, 1866.

 

 

고흐는 밀레작품의 분위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흡사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밀레 작품은 남편의 두상의 하관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노동의 고단함이 잠든채 약간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느낄 수 있다. 아내가 들른 두건의 색도 고흐의 작품에서 보았던 베이지, 즉 상아색이 아니라, 약간 분홍빛이 도는 옅은 주황색으로 보인다.

남편의 청색 데님 바지와 흰색의 면 셔츠는 목화가 유행하였을 당시의 면 소재의 품목이다.

낱가리를 깔고 또 베고 자는 부부의 편안한 일상이 수채화 처럼 투명하게 펼쳐지고 있다.

 

다음 작품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1890>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1890

 

 

본래 이 작품도 외젠 들라크루와의 <착한 사마리아인,1850 >을 임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들라크로아는 루카복음 10장 29-37절에 나온 내용을 유화로 그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율법교사가 던진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마리아인을 예로 들어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29-37).

 

고흐나 들라크로와의 작품에서 사마리아인에게 구원받는 사람은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들라크로와가 묘사한 사마리아인은 붉은 도포를 걸쳤으나 고흐의 작품에는 붉은 터번과 황갈색 도포를 걸쳐서 색상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붓의 터치는 낭만주의 경향의 화가인 들로크로와의 작품도 반 고흐 작품에 비해서 고전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붓의 터치나 물감의 임파스토가 간결하며 곱다. 그러나 고흐의 작품은 이제까지 고전주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두꺼운 임파스토와 거친 붓의 터치가 생명감이 꿈틀거림을 느끼게 한다. 이는 평단의 주목이 화가로서 고흐를 이방인을 바라보듯이 경외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목사가 되고자 바랐던 고흐가 <착한 사마리아인>을 묘사한 것은 그의 예술의 가치관적인 측면에서 많은 해석을 하게 한다.  

 

 

 

 외젠 들로크로와, <착한 사마리아인, 1850>

 

 

 

다음 작품은 <구두, 1886 >이다.

 

작품에 표현된 구두는 농부의 구두로 보인다.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을 헤치고 밭둑을 걸었을 농부의 고단한 하루의 시작이 보인다.

추수를 마친 빈 뜰에서, 부농의 농부가 이미 거둬들이며 떨어뜨렸을 벼이삭을 줏어 다듬으며, 하루 해를 보낸 농부의 힘겨운 하루가 마감이 된다.

해질력 식구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을 농부의 고단한 발놀림이 구두쇠의 둔탁한 소리로 들판을 진동시킨다.

자신보다는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였을 농부의 존재가 이 구두에서 느껴진다.

 

결코 화려할 수 없는 빈농의 존재감과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이 이 초라하고 남루한 이 구두에서 드러난다.

 

  

 <구두, 1866>

 

 

다음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고흐의 채색기법은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고흐 특유의 붓놀림이 자신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고흐는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우끼요에(Uki-joye)채색면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이외에도 이미 파리 시절에 스스로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특유의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라인들의 형상으로 인해서 그의 작품들을 아르누보 스타일로 불리기도 한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반 고흐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하였는데, 달빛이 흐르는 푸른 밤에 사이프러스 나무의 화염무늬와 황금 별빛의 요동치는 소용돌이가 함께 흘러가는 시간의 윤무를 표현한 듯 하다.

 

처음에도 언급하였지만, 10여년 동안의 2000여 점의 역작들중 살아 생존에 팔린 그림은 <아를로에서의 붉은 포도밭, 1888> 작품이다.

아를로에서 빛나는 태양 아래에 모든 대상들은 선명한 색들을 띄면서 고흐의 작품에서 화려한 원색으로 빛난다.

타는 듯한 포도주의 정열과 열기가 색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를로에서의 붉은 포도밭>, 1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