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Aesthetics through Dependent beauty of I. Kant
문구용 연필
(요약) 본 논문은, 칸트의 취미판단에서 부용미의 ‘목적있는 합목적성’의 원리로 디자인 미학을 연구한다. 연구자는 합목적성의 개념을 디자인과 유비시켰을 때 디자인의 컨셉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제품으로 제작되기 이전 이미 디자이너의 마음과 디자인에 담겨있는 아프리오리한 개념으로 보았다. 부용미의 판단으로 인한 디자인의 경우, 개념이 확고한 상태이므로 오성보다는 상상력의 유희가 더 자유로워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부용미는 자유미의 순수한 단층판단과 부용미 자체의 개념적 복합판단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자의 개념적 판단에 따라 자유미로도, 혹은 부용미로도 판단할 수 있다. 디자인의 위치는 부용미의 판단으로 적합한데, 이는 아름다움과 기능의 목적을 ‘아름다움과 완벽성’의 관계로 설정할 수 있어서 그렇다. 아울러 ‘목적론적 스타일’로서 우연성의 방식은 상상력에 따른 유희의 대안에서 오는바, 이는 경험으로 인한 지식의 풍부함에서 온다. 부용미의 판단은 익숙한 디자인과 그 성공적인 수행에서 오기 때문에 공시적이고 또 통시적인 국면이 있다. 디자인 대상은 나날이 사용함으로써 그 아름다움과 완벽성이 축적된다. 디자인 미학은 디자인에 대한 학적인 체계와 확산을 목표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제어 디자인 미학, 목적 있는 합목적성, 목적론적 스타일, 부용미, 완벽성, 우연성,
(Abstract) (스타일이름: Abstract제목)
This thesis is to study design aesthetics by 'purposiveness with purposive' principle of dependent beauty in Kant's judgement of taste. I took the concept of purposiveness as design concept when it was drew to design in analogy, so I think it is concept of a priori which was already contained in the mind of designer and his design before the product is produced. In the case of design according to dependent beauty judgement, because the concept is clear, so the design aesthetics could be judged by imagination play which is more free than understanding. But the dependent beauty is consisted with pure simple judgement of free beauty and conceptive complex judgement of dependent beauty itself, so it could be judged as free beauty or dependent beauty by conceptive judgement of subject who watch the object. The place of design is appropriate to judgement of dependent beauty, it is because the purpose of beauty and function could be set as a relationship of 'beauty and perfectness'. Along with this the way of contingency as 'teleological style' comes from alternative of play due to imagination, so it comes from plentifulness of knowledge by experience. Because the judgement of dependent beauty comes from familiar design and its successful performance, it has synchronic and diachronic aspects. It is because the beauty and perfectness is accumulated by daily use of design object. The reason that the design aesthetics is to aim academic system and expansion of design is due to this.
Keyword Contingency, Design Aesthetics, Dependent beauty, Perfectiveness, Purposiveness with purposive, Teleological style
1. 서론 (스타일: 1. 제목)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스타일: 1-1. 제목)
본 연구에서는, 칸트의 미학에서 의구심을 갖게 하는 질문 몇 가지를 제시함으로써 연구의 동기로 삼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할 때 대상의 관심과 목적으로부터 분리하여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순수하고 개념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용이 역시 가능한가? 도 물을 수 있다.
칸트는 18세기 말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을 객관적인 기준의 보편성과 미적인 쾌의 주관주의를 화해하려는 시도에서 “미 자체를 위한 미(beauty-for-beauty's sake)”라는 전형적인 답을 주었다. 이 답변과 관련하여 칸트 미론으로 알려진 대부분은 자유미(free beauty)와 관련한 취미판단들이다. 연구자는 칸트 미론에서 자유미에 관한 순수한 시각만이 아니라 부용미(dependent beauty)에 대한 실제적 논의를 통해서 위에 열거한 문제의 답변을 찾아야 할 필요를 갖는다. 만약 어떤 미적 대상이 우리 앞에 있으면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을 만든 것”이며, “누가 만들었으며”, “무엇으로 만들었는 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구심이 해결되었을 때 나오는 즐거움은 오성과 이해 뒤에 오는 만족감이며, 대상의 형식적 속성들의 이해에서 오는 즐거움만큼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답은 부용미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에 의존하는 객관적 원리들을 ‘무목적 합목적성(purposiveness without purpose)’의 형식이거나 단순한 ‘형식적 합목적성’(§17, 61)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도 자유미에 대한 원리이다. 부용미의 원리는 ‘목적있는 합목적성(purposiveness with purpose)’이다. 이는 판단의 형식이 순수하냐 혹은 불순하냐의 차이인데, 그 차이는 인지가 개입되어 있느냐 혹은 아니냐에 따라 구분한다. 이렇게 목적과 합목적성의 논의는 칸트가 미의 종류로 밝힌 자유미와 부용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디자인에 대한 판단에서도 중심적인 부분이라고 본다. 그래서 연구자는 칸트의 미적인 판단에서 합목적성의 의미는 무엇이며, 디자인의 어떤 의미와 관련되는지 현대 미학자들의 논의를 통해서 조망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자유미와 부용미의 판단의 차잇점과 공통점을 살펴보는 가운데 합목적성이 디자인 일반에서 형식과 기능의 문제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그 내용을 도출하여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용미에서 아름다움과 완벽성의 관계, 목적론적 스타일로서 기능과의 관계를 디자인 미학의 내용으로 개진시키려 한다.
1-2. 연구의 방법 및 문제
본 연구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제인 포시의 『디자인의 미학』을 주축으로 문헌중심의 연구를 하였으며, 부용미에 대한 연구는 현대 미학자들로 뮐더 이튼(M. Muelder Eaton), 닉 장일(Nick Zangwill), 폴 거여(Paul Guyer), 로버트 윅스(Robert Wicks), 필립 말라방드(Philip Malaband)의 논문에서 문제의 방법을 도출하였다.
디자인 일반에서 취하는 양대 목표는 아름다움과 기능성이다. 아름다움은 형식의 외형에서 오는 만족의 즐거운 감정으로 자유미의 ‘형식적 합목적성’으로 판단한다. 기능성은 부용미의 ‘목적있는 합목적성’의 원리에서 찾는 만족감이지만, 기능의 완벽성은 아름다움의 판단으로 유도되기도 한다. 연구자는 부용미에서 디자인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 논문을 작성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취미판단에서 합목적성의 의미를 칸트의 자유미와 부용미의 시각에서 해석해보고, 자유미와 부용미의 판단의 차이는 무엇이 작용함으로서 그런 결과를 냈는가?를 도출하고, 부용미에서 완벽성과 아름다움의 관계, 순수하고 불순한 판단의 차이, 목적론적 스타일이 부용미의 판단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되어 취미 판단을 끌어내는지 디자인 미학의 논의로 개진시켜 볼까 한다.
2. 취미 판단에서 ‘합목적성’의 의미
칸트는, “취미판단은 그 근저에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이다.”(§11)란 명제를 내걸고 있다. 취미는 미를 판정하는 능력이며, 판단이란 주체와 판단되는 대상들 사이에서 하나의 관계를 전제하는 객관적 특성에 관한 것이다. 취미판단에서 ‘합목적성’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 또는 ‘형식적 합목적성’으로 쓰이면서, 순수한 무관심적 만족으로 말한다. 즉 일절의 목적을 떠나 대상을 표상할 때의 주관적 합목적성만이 취미판단을 규정하는 근거로 얘기한다. 그래서 취미판단은 관조적이다. 다시 말하면 취미판단은 대상의 현존재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대상의 성질을 쾌•불쾌의 감정과 결부시키는 판단이다. 연구자는 미적 판단의 자율성을 통해서 디자인 판단에 대한 더 나은 주장을 하려고 한다. 즉 ‘취미의 만족은 무관심적인 자유로운 만족이다’란 의미를 디자인 미학의 단초로 삼아서 오히려 디자인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 그 가능성을 모색해볼 것이다.
칸트에게서, “목적”(purpose, Zweck)과 “합목적성”(purposiveness, Zweckmἅβigkeit)은 선험적인 결정력에 따른다. 그래서 “목적이란 대상의 원인으로 고려되는 개념인 한에서 대상의 개념이며”, “어떤 개념이 그 대상에 관해서 가지는 인과성이 합목적성(forma finalis)이라고(§10, 33)”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목적이나 합목적성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개념의 속성으로 봐야한다. 목적은 하나의 대상이 나타낼 수 있는 공리적 목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테면, 하나의 타이어는 그네도 될 수 있다는 일반적 유용성으로서가 아니다. 이렇게 칸트의 미학에서 목적이란 디자인 일반에서 말하는 기능성과 연관되지만 사용성과는 차별된 의미이며, 그 보다는 인지적 개념을 말한다.
가령 어떤 의도적 대상, 즉 합목적성의 대상은 대상의 존재보다 앞선 계획에 따라서 하나의 의지(will)로 창조되어 온, 또 그래야만 하는 바의 우선하는(prior) 개념을 내포한 판단으로 말한다. 목적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의도도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연필은, 인지적 판단에서 하나의 목적으로 고려하거나 목적의 산물로 고려한다. 연필이 하나의 사용을 가져서가 아니라 하나의 계획에 따라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다고 판단하는 데서 그래야 하는 바 아프리오리한 개념을 갖는 것이다. 해변에서 우연히 발견된 백악질 돌도 같은 목적으로 제공될 수 있다. 하나의 도구로서 감각적으로 표면에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악질 돌이 표지가 된다고 해서 의도적 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디자인되지 않았으며, 마음속에서 이런 사용으로 상상하지도 않았다. 의도, 즉 목적은 이렇게 사용과 동등한 의미는 아니다. 이처럼 칸트의 미적 판단에서, 목적은 하나의 아프리오리한 원리이다. 대상의 목적 개념은 대상의 최종적 존재의 조건이 되거나 또 현존보다 앞서는 개념이며,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적 이해 즉 오성(understanding) 안에서 깨닫게 한다.
합목적성이란 인지의 결정적 판단의 통합적 요소이며, 쾌적성(the agreeable)•선•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판단에서도 합목적성이 조정한다. 이 모든 경우에 합목적성은 아프리오리 하다. 칸트의 취미판단은 주로 자유미의 판단이 알려져 있으며, 자유미에서 목적의 속성은 실제적이지도 현실적이지 않으며,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 특성은 평가될 수 있는 표상과 관련한 판단에서 현재여야 하며, 판단의 목적은 모든 판단의 아프리오리한 결정적 근거로 얘기한다.
그러나 디자인은 무관심적, 혹은 무목적인 형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디자인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려는 목표인 기능이 있다. 그래서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목표달성을 위한 주변의 모든 지식에 관심을 두어 총력을 기울인다. 연구자는 무관심적 합목적성이 아닌 ‘유관심적 합목적성’을 모색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물들로 초코렛, 육모초, 연필, 육각형의 사례에서 쾌적성, 선, 미의 판단을 적용하고, 주관적•객관적•실제적•인지적 합목적성을 선택적으로 적용하여 디자인 미학의 근거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초코렛 - 초코렛은 즐거운 감각으로 감관에 만족을 줘서 쾌적한 것과 관련된 주관적 합목적성이 나온다. 쾌나 쾌적성은 善과 같은 개념들에 근거하지 않아 인지적인 것과 관련되지 않 으며, 비이성적 동물들도 관여한다. 초코렛은 쾌적한 향락이란 경향성을 낳으며, 욕구의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 쾌적한 것은 개인마다 다른 고유한 감관을 가진다. 초코렛의 포 장은 저채도와 저명도의 색으로 하고, 단순하고 굵은 타이포그라피를 적용해 본다.
•육모초 - 건강(몸)에 좋을 것으로 알려져 이성적인 욕구와 관련된 관심이 따르며, 객관적인 판 단으로 고려된다. 목적론적 시각에서 善의 개념과 관련한 인지의 요소를 내포하여 기능 과 관련된 개념이 있고, 그래서 순수한 실천적 만족을 수반한다. 따라서 존중되거나 인 정되는 반성적 판단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 합목적성과 관련한다. 육모초 고유의 향과 색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채도의 카키색과 자연스런 타이포그라피를 적용한다.
•연필 - 마음에서 작인(agent)의 개념적 결과를 가진 가운데 목적을 갖고 제작된 것이다. 실제적 합목적성의 산물로 판단되며, 유관심적인 합목적성과 연관되는 디자인 제품이다. 그러나 연필과 아래에 예를 든 육각형은 자체적으로 쾌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명도와 고 채도로 완충하고, 연필의 필체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서체를 활용해본다.
•육각형 - 자연과 물질이 만나 형성된 도형으로 변이 6개, 내각의 합은 720°이다. 특별한 작인은 알 수 없으나 인지적이고 결정적인 판단으로 되어서 인지적인 합목적성으로 본다. 미 적인 고려로 볼 때 육각형은 안정적인 형태와 공간을 효율적으로 차지하여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실제 적용하려는 관심을 갖고 모방해 왔다.
예시한 사물들은 사물 자체 보다는 사물과 관련한 개념들이 판단에 먼저 떠오르는 데, 이것이 오성의 작용이다. 주관적 합목적성의 판단은 인지적이기보다는 반성적이고, 그 쾌는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킨다. 한편 객관적 합목적성은 인지적 개념을 갖고 있고, 선과 관련한 기능의 개념은 문화적으로 답습된 경험적 지식에 의한 판단으로 존중된다. 실제적이고 인지적인 합목적성은 그들의 작인에로 지시되며, 인지적 합목적성은 유추하는 가운데 접근할 따름이다. 위의 사물들 가운데, ‘유관심적 합목적성’에 가까운 것은 주관적 합목적성을 띄는 초코렛, 객관적 합목적성으로 해석되는 육모초, 실제적 합목적성을 갖는 연필, 인지적 합목적의 경우인 육각형의 사례 모두 해당된다. 그래서 유관심적 합목적성은 욕망과 관계한 만족감을 끌어내고, 선의 기능이 있어서 존중되기도 한 반성적 판단이다. 디자인은 이렇게 주관적•객관적•실제적, 그리고 인지적 합목적성이 모두 적용되는 ‘총합적 지식의 판단’이라고 본다.
칸트는 ‘합목적성’의 개념으로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방식을 주었으며,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디자인은 주관적이고, 인지적이고, 윤리적 판단의 형식과 연관됨으로써 이성적인 구성요소들과 함께 한다. 아름다움은 전반적으로 판단하는 내면의 마음에서 쾌를 수반한다. 디자인에 대한 아름다움의 판단도 내면에서 오는 쾌이며, 다만 무관심적이지도 또 욕망과 무관하지 않는 실제적인 합목적성이 디자인의 특징이다.
2-1.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
칸트에게서 ‘취미의 쾌’를 불러일으키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어떻게 존속되는가? ‘취미의 쾌’는, 선과 쾌적성의 방식에서처럼 이성이나 욕구에 의해서가 아닌, 쾌에 의해서 중재된다. 주체자가 아름다움을 판정하기 위해서 대상의 표상을 인식하면 주체자의 내면에서 인식력들이 자유로운 심적 상태가 되는데, 바로 이 심적 상태를 칸트는 ‘상상력과 오성이 자유롭게 유희’하는 감정의 상태로 얘기한다. 그런 감정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 “직관의 다양을 결합하는 상상력(imagination)과 그 다양한 표상들을 개념에 의하여 통일하는 오성이 필요하다”(§9. 28)는 것이다. 취미판단에 있어서 표상에 대한 이런 주관적(미감적) 판단,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스런 상태’가 쾌감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취미의 쾌’는 주관의 심의가 자유로울 때 인지력의 조화로운 유희와 자유로부터 유래하는 반성적 판단의 결과에서 온다. 미적 판단이 아름다움의 반성적 특성을 주장할 수 있다면(§8, 23) “거기에는 강제가 없으며”, 상상력과 오성이 유사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표상으로 인해 초래되며(예, 빨강색- 달콤함), “연상의 법칙들에 의해서 생산적이고 자발적으로 고려된다(§22, 69).” 왜냐하면 상상력은 ‘오성’의 결정적 규칙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미적 쾌’를 주는 바에 활동적으로 참여한다. 이런 표상에 내포된 인지력은 상상력과 오성이 자유로운 유희를 한다(§9, 29).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오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상상력은 한계 없이 완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아프리오리한 경우에 특별한 표상에 대한 규칙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상력의 자유’가 인지의 규칙과 더불어 조화나 필요에 의해 조절될 수 있음을 알린다.
칸트의 주장처럼, 헤리 브로커(Harry Blocker)도 “미적 경험에서 상상력은 인지력으로 가질 수 있는 오성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우며, 이는 직관에 따른 가능한 조화의 광범위한 정렬을 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오성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미가 자유미이다. 왜냐면 자유미에는 개념이 없어서 상상력과 오성이 자유롭게 유희할 뿐이다. 이는 ‘무목적 합목적성’의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상상력은 “인지의 대상이 되는 상상력의 표상과 같은 … 준비가 된 … 표상의 형식 안에서 오성에 의해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이 오성에 의해 규제를 받는 미가 부용미이다. 부용미는 개념의 폭을 가진 복합판단의 대상이라서 ‘목적 있는 합목적성’의 원리가 소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미의 판단은 개별적인 감각과 욕구의 특수성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리고 전적으로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판단들은 윤리적 법칙이나 기준적 인지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판단들은 자발적이다. 일상의 경험에서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아름다움, 자유미의 과정은 어떤가? 사례를 통해서 유추해보자.
여름 날, 나무들이 정렬된 거리를 따라 걷다가 상상하는 것은 길거리에 비친 얼룩달룩한 패턴을 보는 것이다. 이 패턴은 머리위에 케너피를 통해서 반짝이는 태양이 만든 것이다. ‘얼마나 아름 다운가?’ 당신은 생각에 잠긴다. 이 미적 반응은 그림자 패턴이 준 단순한 표상에 대한 쾌이다.
예시에서 칸트가 주장한 상상력은 감각적인 인상들을 주며, 자유를 경험하게 하여 단순한 감각적 쾌를 넘어서 있다. 이런 덧없는 경험, 아름다움의 쾌는 자유의 순간에 만들어진다. 유일하고 자발적이고 평결적 판단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험은 그 장소와 그 시간에 그 패턴을 보고, 적합하게 쾌를 느끼도록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룩달룩한 패턴을 보는 순간, 좀 전의 쇼핑목록으로 가득한 메모의 기억으로 인해 웃을 수도 있고, 혹은 태양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나무에 집중하여 쾌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은 휴식상태여야 한다. 반성적으로 욕구는 중지 상태에 있어야 한다. 태양이나 나무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 아무런 속성도 — 감정에 대한 외부적인 원인을 제공할 뿐이다. 즐거움이란 유일한 마음의 기능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란 의도적으로 추구할 수 없고, 주어진 경험에 따라 요소들의 관계로부터 오는, 그냥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적인 것’이란 대상의 성질이나 속성보다는 ‘무관심적으로 공감하고 관조하는 주관적 태도’에서 오며, 어떤 정신적 활동이란 최전선에 있다.
아름다움의 설명은 판단력 내부의 문제이며, 개인적인 쾌와 관련하는데 있어서 주관적이며, 판단의 형식에 있어서는 자발적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욕구, 어떤 지식, 어떤 관심을 갖지 않은 가운데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쾌를 주는 단층판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름다움은 지식과 윤리와 연관되어 오성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는 복합판단이다.
그녀가 자주 가는 산책로에는 늪지가 조성되어 있다.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늪지에 자생하는 보 라색 꽃들이 그녀는 늘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돌아올 때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보라꽃을 바라보 면 마음에 즐거움이 일어나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어느 날, 그녀는 우기가 지속되던 며칠 동안에 가보지 못했던 늪지가 궁금해졌다. 늪지에 도착하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천에 무성 해진 보랏꽃들이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의 카메라 셔터를 연달아 터뜨렸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의 친구인 생태학 자로부터 늪지에 자생하는 보라꽃은 털부처꽃이며, 늪지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서 바라보는 털부처꽃에서 그녀가 몰랐을 당시의 아름다움의 쾌와 현재에는 공감할 수 없는 불쾌를 느꼈다.
이런 경험은 ‘아름다움의 쾌’가 단순히 감각적인 표상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감각적인 표상이 먼 거리에서 주체에게 무관심적으로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서 만족스런 쾌로 느끼게 하지만, 그 대상이 공동체에 미치는 가치의 측면에서도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있다. 이는 아름다움이 부용미의 판단과 관련지으면 오성과 관계함을 알려준다. 즉 부용미의 판단은 지식(털부처꽃)과 가치(생태계 파괴)적인 면과 연결됨을 알려준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유미와 부용미의 차잇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3. 디자인과 부용미
현대 디자인이 뜻하는 의미를 ‘합목적성’과 연관시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은 하나의 계획으로서 컨셉이라는 것이다. 헤스켓이 정의한, “디자인은 디자인을 제작하기 위해서 디자인을 디자인 하는 것이다(Design is to design a design to produce a design.)”에서 세 번째의 디자인의 종류가 디자이너의 컨셉, 혹은 프로포잘이다. 이는 디자이너의 마음속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라 소비자들이나 사용자들은 알 수 없다. 연구자는 이 개념이 칸트의 ‘합목적성’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는 하나의 사물이 갖게 될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합목적성을 어떤 질료와 형식으로 다양한 관계 속에서 하나로 디자인하는 가가 디자이닝이다. 합목적성은 칸트가 분류한 미의 유형 중 자유미(pulchritudo vaga)와 부용미(pulchritudo adhaerens)에 다 있다. 칸트는 자유미를, “자신이 나타내는 오브제에 대한 개념이 없음을 전제로 하여 타고난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정의한다. 그에 비해 부용미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에 따른 대상의 완벽성을 가져야 한다(§16, 48-49)”고 언급한다. 개념이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인지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지식이다. 그런데 부용미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단층판단(자유미)과 개념으로 종합된 복합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복합 개념은 지적인 인지작용으로 인한 경험의 산물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는 완벽성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부용미에 대한 판단인데, 연구자는 컨셉이 디자이너의 경험에서 오는 인지의 합산이라고 보기 때문에 부용미를 통해서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유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먼저 부용미의 한 부분이면서 부용미와 다른 자유미를 먼저 살펴보자.
3-1. 자유미
칸트는, 자유미의 특성을 ‘순수한 취미판단’에서 대상의 “목적없는 합목적성”으로 본다. 그리고 자유미에 대한 판단은 늪지의 보라색 꽃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무관심적이고 비인지적이며,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로부터 쾌를 환기시킨다고 본다. 그래서 어떤 목적이 없이도 합목적성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만일 목적이 전제되어 있다면 형태를 관조하면서 즐기는 상상력의 자유가 오성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고 보는 것이다. 칸트가 자유미에 해당되는 사례들로 든 것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꽃, 새소리, 바다조개 등 이다. 또한 제조되거나 의도된 오브제들로는 벽지나 화단에 있는 이파리들, 그리스풍의 도안을 들고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마치 가사가 없는 음악”(§16, 49)과 같다고 말한다. 가령 식물학자가 꽃에 대한 미적 판단을 자유미로 할 때 “꽃이 생식기관이라는”(§16, 49) 식물학자의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는 무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는 꽃에 대한 목적적인 본질을 의식하지 않는 비인지적인 태도와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인테리어 장식가는 벽지에 대한 가능을 배제한 도안작업을 해야 하고, 피아니스트는 음악을 들을 때 주어진 작곡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분리해야만 자유미의 판단인 것이다. 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전 장에서 예시했던, 길거리에 비치는 얼룩달룩한 나뭇잎의 그림자나 패턴에 불과한 성질로 주체자의 무관심성과 연관된다. 자유미의 판단은 이렇게 추상성이나 무지를 고려한다.
자유미의 판단은 앞서 살펴본 취미 판단의 구조와 일치하며, 동시에 한계가 있는 경우를 가진다. 순수한 취미판단은 자극도 감동도, 즉 미감적 판단의 질료로서의 어떠한 감각도 그 규정근거로 갖는 것이 아니다(§14, 44). 즉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판단에서 우리는 대상의 ‘무목적 합목적성’으로 반성한다. 여기서 무목적성은 무관심성이라는 주체자의 미적 태도를 말한다. 즉 바라보는 대상과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무관심적으로 공감하며 주목하고 관조하는’ 태도로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유미에서는, 미적 쾌에 대한 조건으로 인지적 쾌에 대한 조건을 배제한다. 이는 어떤 타입의 사물이 대상의 범주화와는 독립된 채로 발생해서, 인지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다.
로버트 윅스(Robert Wicks)는, 우리가 “대상의 순수미를 판단할 때 시공간적(spatio-temporal) 구조에 무관심적으로 참여하고, 대상이 자극하는 감각적 쾌, 대상이 발생시키는 지적인 고려를 배제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감상자는 대상의 구조적 디자인을 해석하지 않고, 대상의 정확한 목적에 관여하지 않고, 대상의 ‘합목적성’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대상이 보여주는 바, 대상의 형식에서 합목적성을 초래하는 것을 독립된(selbständing) 미로 언급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서 이미 적응되었고, “만족”의 대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으로(§23) 본다. “선험적 적응”에 대한 이해는 대상의 조직화된 구조의 이해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3-2 부용미
부용미에 대한 미적 판단은, 대상에 대해서 판단하는 주체의 개념적 지식과 그 작동 양상들이 분리될 수 없다. 부용미에 대한 판단은 자발적이며, 주관적이자 보편적인 자유미로 출발은 하지만, 주체자의 유관심적 쾌로 인한 오성이 자유로운 유희를 제재한다. 관심은 필요를 전제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필요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부용미의 개념을 통하여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서 목적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감상할 때 대상의 타입은 ‘목적’이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바’를 정의하는 것이며, 대상이 갖고 있는 완벽성에 대한 판단은 ‘목적있는 합목적성’을 반성하며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이 갖고 있는 완벽성에 대한 판단은 대상의 타입이 정의하는 바와 일치하면서 그런 특성의 관점에서 대상의 성질을 반성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부용미의 판단은 자유미에 대한 순수한 판단과 부용미 자체의 완벽성에 대한 판단, ‘아름다움과 완벽성’ 즉 미와 선에 관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부용미 자체의 ‘목적있는 합목적성’의 견해 안에서 자유미의 ‘목적없는 합목적성’에 주의를 포함시킨다. 부용미는 미감적 만족과 지적 만족이 결합됨으로써 취미는 고정되며, 또 보편성을 잃는다. 연구자가 보기에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판단들은 부용미의 판단들이라고 보는데, 예술작품의 내용들은 미적 이데아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감상자 개개인마다 경험의 양과 질이 달라서 보편적이지 않은 다른 개념으로 작품들의 내용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경험이 비례해서 같은 작품에 대한 판단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칸트가 부용미로 든 사례들은 인간미, 말의 미, 건물의 미이다. 이들 각자는 “대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하는 목적의 개념을 전제로 하며, 아울러 그것에 대한 완벽성의 개념을 결과적으로 염두한다”(§16, 50). 가령 인간미에서 인간이 가져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어떠한 목표를 성취하여도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면에서 위배되면 칸트는 인간미에서 멀어졌다고 본다(§17, 60). 이는 그리스에서부터 내려오는 미와 선을 동의어(kalokagathia)로 보는 문제와 관련 있으며, 플라톤이 말한 완벽성의 표현이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부용미의 사례에는 자유미를 포함시키며, 자연물과 인공적으로 제조된 오브제들에도 있다. 이런 사물들은 자체의 의미를 담은 개념과의 관계에서만 유일하게 아름다울 수 있으며, 하나의 사물이 어떤 기능을 갖는다면 그것은 칸트가 말한 목적의 개념이며, 부용미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복합판단으로서 부용미에는 자유미가 들어가 있는 데, 그 관계를 현대 미학자들의 견해를 통해서 살펴보자.
3-3 부용미안에 자유미
필립 말라방드(Philip Mallaband)는 자유미와 부용미의 판단을 관계시켜, 각 판단의 이해를 명료하게 해준다. 그는 “자유미의 판단은 취미의 단층 판단이며, 부용미의 판단은 취미의 순수 판단과 그런 종류의 선의 판단으로부터 만들어진 복합판단으로 정의한다.” 이는 부용미에 자유미의 판단이 포함된다는 정의를 준다. (a) 모든 부용미의 대상들은 미적으로 가치가 있다. (b) 모든 자유미의 대상들은 미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만약 자유미의 긍정적 판단이 부용미의 긍정적 판단에 필수적이라면, (c) 모든 부용미의 대상들은 자유미일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부용미의 대상 안에는 자유미가 있지만 자유미의 대상 안에는 부용미가 없으므로 부용미와 자유미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말라방드의 의견이다.
그러나 대상을 부용미로 판단하는 것은, 폴 거여(Paul Guyer)가 “소극적” 혹은 “외부적(external - 지각 세계와 독립된)” 판단이라는 설명에 연구자의 주목을 끈다. 거여의 견해에서 보는, 부용미의 판단은 대상의 목적에 일관하는 대상의 구조적인 모습(像)에 우리의 미적인 관조를 빼앗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의 아름다움을 판단해야 한다면, 설령 그 교회의 문이 밝은 채색의 그라피티로 뒤덮여서 감상의 초점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아름다운지, 혹은 아름답지 않은지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 그라피티에 대한 이념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여에 따르면, 부용미의 판단은 마치 자유미의 판단에서 하듯이, 대상의 주어진 형식을 자유롭게 관조하대, 대상의 목적이 주는 한계 내에서 관조의 영역을 한정하라고 한다. 이는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에서 오성의 한계가 주는 시사점이다. 그리하여 부용미의 판단은, 목적에 대한 지식에 한계를 줄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이 전해져 초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여의 의견은, 형식의 어떤 자극이 취미판단을 방해하는 이물로 언급한 것(§14, 44)이다. 그러나 거여는, 부용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어떤 긍정적인 방식에서 대상의 목적의 개념을 전제하는 해석에 실패했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교회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현실의 교회가 주는 외양에서 오는 쾌를 부상시켜 말할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그 빌딩에 교회가 들어섰다는 사실이 교회의 의미나 기능에 긍정적인 정보로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의 목적에 대한 고려가 순수하게 배타적인 방식으로 작용함을 알린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문에 칠해진 그라피티는 자유미로 감상하고, 교회는 부용미로 판단하데, 그라피티의 개념을 배제하고 교회의 목적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문신을 한 뉴질랜드인의 모습에서 그 문신의 패턴은 당초무늬로 부드럽고 유기적인 리듬으로 강조하는 것에는 긍정적이지만, 문신을 한 뉴질랜드인도 사람이라는 점에서 문신과 사람을 분리하여 판단하게 하는 관점과 같다.
예에서 보듯이 부용미의 특이점은, 형식의 어떤 부분집합으로부터 일정 부분 분리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의 목적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대상의 목적에 대한 소극적인 설명으로 실제 교회의 아름다움은 본래 교회의 목적과 상관이 없다. 이는 교회의 아름다움이 교회의 문에 칠해진 색상이 자극하는 감각적인 쾌와 상관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거여의 견해는, 부용미의 판단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상의 목적에 대한 개념을 “전제한다”는 칸트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으며, 또 교회의 외모가 아름답다는 판단과 아름다운 교회로서 교회가 지향하는 긍정적인 판단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부용미의 소극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4. 부용미에서 완벽성과 아름다움
연구자는 아름다움과 윤리를 구별하려는 칸트의 논점에서 오히려 디자인의 완벽한 기능을 주목하였다. 칸트는『판단력 비판』§15절에서 아름다움은 형식적 합목적성, 즉 ‘목적없는 합목적성’을 판정근거로 갖는 만큼, 선의 표상과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선은 객관적 합목적성, 즉 대상과 일정한 목적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합목적성은 외적 객관적 합목적성, 즉 대상의 유용성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적 객관적 합목적성, 즉 대상의 완벽성과 관계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의 개념은 완벽성의 혼란한 개념, 선의 개념은 완벽성의 판명한 개념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래서 완벽성은 아름다움 자체 보다는 선을 목표로 하는 윤리적인 관점이며, 그래서 유용성 즉 디자인의 기능은 선의 개념과 밀접하다고 보는 것이다.
로버트 윅스(Robert Wicks)는 부용미의 판단에서 완벽성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대상의 목적과 아름다움 사이의 관계에 따른 객관적 설명은 대상의 완벽성에서 취해지는 쾌속으로 부용미의 특징적인 쾌가 붕괴되지 않을 것을 필요로 한다.” 이는 칸트가 대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와 대상의 완벽성에서 오는 쾌는 명확하게 독립된 것(§15, 45)으로 본 윅스의 해석이다. 즉 “대상의 완벽성은 대상의 미를 부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X를 지각하면서 위대한 쾌를 경험하는 것에서 이런 쾌는 X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단히 희귀하고 기괴한 모습의 곤충은 그것의 생물학적 타입을 완벽하게 예시하지만 그 곤충을 즐겁게 바라보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 예시와 같다. 그와 같은 일반적인 반성에서 칸트는 ‘완벽성’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독립성을 의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에서 하는 아름다움의 판단에는, 완벽성이나 즉각적인 감각이 혼용되어 있다고 본다. 가령 전기밥솥이나 승용차가 아름답다고 할 때 신속하고 완벽하게 밥을 해주고, 먼 거리의 이동을 완벽한 승차감으로 해준다는 판단으로 상상한다. 디자인에서는 칸트가 구분한 인지적인 쾌, 감각적인 쾌, 반성적인 쾌가 자주 혼용되어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게 한다.
연구자는, 칸트가 부용미에서 ‘아름다움’과 ‘완벽성’ 사이의 관계를 구분했던 것처럼, 디자인에서는 지나치게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에서 완벽성은 그 제품을 취급하고 사용하는 가운데 깨닫는 경험의 문제이다. 칸트는 부용미의 개념에서 주요 목적을, 아름다움이 윤리적인 고려로 인해서 완화되는 판단의 양식을 설정하는 데 있었다. 부용미에 대한 칸트의 논의에서 요점은, 대상의 목적은 ‘상상력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것이 핵심적 원리이다. 즉 우리는 부용미의 대상에서 자유미를 발견할 수 없는 원리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무관심적 태도에서 인지력이 발동하면서 ‘상상력과 오성이 자유로운 유희’를 하면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데, 부용미의 판단에서는 이미 대상의 기능이라는 목적이 고정되어 있어서 오성의 작용은 나오지 않고, 형식에 입각한 상상력만 발동되기 때문이다.
거여는,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대상의 아름다움을 배제한다면 이는 완벽성의 정도만을 판단하는 것이며, 대상에 기능을 적용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형식이 불완벽함을 배제하기 위한 기능으로” 말한다. 마찬가지로 로버트 윅스도 이런 소극적인 주장을 불일치(incompatibility)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마루에 십자형 장식을 새길 계획이 없는 어떤 교회는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수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 형식의 사례일 수 있으며, 교회의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요인으로”본다. 거여와 윅스의 의견은 자유미에 대한 판단에 일차적인 가치를 두고, 그 다음에 목적이 우리의 판단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부용미에 이차적 가치를 두고, 그리고 어떤 사물들은 지금껏 주장한 것을 배제한다는 뜻에서 원리적으로 자유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거여는 칸트이론에서 목적에 대한 개념을 우리 판단이 참여하는 불가피한 형식으로부터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속성들에로 그 역할을 변형하고 있다. 윅스는 부용미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1) 부용미의 판단은 대상의 목적을 판단하는 개념을 “전제한다”. 2) 윤리적인 목적을 고려함으로써 부용미의 목적을 지나치게 협소화 하지 않는다. 3) 자유미와 부용미 사이에 특징은 각 대상보다는 각 판단에 있다는 칸트의 견해를 존중한다. 4) 완벽성의 판단 속으로 부용미의 판단을 붕괴시키지 않는다.
4-1. 순수하고 불순한 취미판단
부용미에 대한 미적 판단은 디자인 미학의 중심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무관심이 아닌 유관심으로 판단하여도 취미의 반성적 판단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칸트는 부용미에 대한 판단들이, ‘사물의 완벽성을 낳기 위한’ 목적의 개념을 ‘전제한다’고 밝혔다. 즉 ‘목적의 전제와 완벽성의 개념’이다. 완벽성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관심에 따른 경험과 지성의 훈련이 쌓여야 가능하다. 이는, 디자인이 많은 종류의 정보를 일관된 논리로 조직화하는 개념적 과정이라고 할 때 부용미의 판단과 맥락이 통하는 이치이다. 칸트는 부용미에 대한 판단을 ‘취미의 응용판단(§16, 52)’으로 언급하면서 미적 판단과의 화해를 유도하려는 방식을 보여준다. 가령 하나의 아름다운 시계를 비전문가가 판단할 때 시계는 자유미이고, 시계 디자이너가 판단할 때는 부용미이다. 부용미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지식이 필요하다. 시계를 부용미로 판단할 경우, 시계의 개념과 시계의 완벽성에 대한 밀접한 평가가 따라야 한다. 즉 시계는 하나의 목적을 가졌으며, 그리고 그런 목적에 완벽하게 적합한 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부용미의 판단에는 복합적인 판단이 필요불가결하다. 우리는 자유미를 판단하지 않고 부용미로 판단하는 대상이 있을 수 없다. 고로 “자유미의 판단에서 긍정적인 조건의 만족은 부용미의 판단에서도 필수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
부용미에 대한 판단은 개념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순수한 판단과 불순한 판단이 능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록 취미가 순수하게 복합적인 평가 내에서 구성되었다 하더라도 부용미는 취미의 순수한 판단이 아니다. 그 불순한 판단은 지성적 쾌가 적절하게 미적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지성은 무관심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헨리 알리선(Henry Allison)은 유일한 복합적인 판단으로서가 아니라 두 가지 판단들의 조화로서 부용미를 의식하였으니, 즉 “자유미의 순수한 판단과 목적을 가진 불순한 인지적 판단”이다. 즉 부용미의 판단에서 미적인 요소는 자유미의 판단에서와 동일하다. 이는 부용미의 대상들 모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유미일 수 있다는 전제이다. 알리선의 이런 제안은 미적 판단에서 ‘유연성’을 준다. 즉 우리는 자유미에서 대상의 형식을, 부용미에서는 지식을 판단하고, 그리고 개념적 지식에서 추출한 복합적이고 또 합성적 판단은 부용미에서 온다. 이런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한다.
(a) 부용미는 대상의 속성보다는 우리의 판단에 있다. (b) 하나의 사물, 하나의 꽃, 하나의 말은 자유미일 수도 부용미일 수도 있다. (C) 이런 합성적이고 복합적인 판단 내에서 반성적 요소는 취미에 대한 칸트의 분석과 일관한다.
우리는 디자인 경연대회 전시장, 디자인 박물관에서는 디자인 제품들을 순수하게 바라만 보고, 균형이나 비례, 선의 조화에 관한 합목적성의 순수한 미적 판단에 유념한다. 이런 경우, 디자인에 대한 판단은 현실적으로 대상의 기능을 포함시키지 않는 미의 순수한 판단이다. 우리는 디자인 대상이 의미하는 바 기능을 알지만, 꽃이나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얼룩진 패턴들의 칭송처럼 자유미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적으로 디자인을 평가하여 승인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원하는 제품이 우리의 목적에 따라 완벽하게 수행하는 가? 유관심적 판단으로 평가한다. 최근에 말라방드는 하루살이에 부용미의 판단을 적용하여 디자인의 목적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루살이는 작은 곤충으로 멀리 날 수 없으며, 나약한 날기를 한다; 많은 하루살이는 하루보다 적 게 살며, 자손을 낳기 전에 때론 죽는다. 이런 숙고 없이 곤충을 아름답다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 다; 그들은 산뜻하지 않는 색상과 작은 체형 때문에 다른 곤충들과 겨우 구분될 수 있을 뿐이 다. 하루살이에 관하여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는 희귀한 허약성으로 곤충을 지각하 고, 이런 미덕으로 하루살이를 미적으로 가치있게 판단한다.
말라방드는, 어떤 대상이 개념적으로 ‘얇은(thin)’ 경험이면서 쾌를 야기한다면 자유미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적절한 쾌로 이끌 수 없다면 자유미의 경험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대상에 실제적이고 개념적 내용을 더 첨부한다면 우리는 즐거울 것이고, 그 대상에 대한 ‘두꺼운(thick)’ 판단은 부용미로 말한다. 왜냐면 부용미는 의구심을 가지고 사물의 지식을 명확히 하려는 하나의 경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하루살이는 ‘나약한 비행’, ‘자손을 낳을 수 없을 것 같은’ 속성을 염두한 상태에서 하루살이를 경험하면 적절한 쾌적한 반응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속성의 개념들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루살이라는 곤충은 그저 추하거나 불쾌한 것으로 판단되어 우리의 경험은 부용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말라방드는, 하루살이가 멀리 날 수 없으며 자손을 산출하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사실은 불완벽성이거나 혹은 하루살이의 약점의 속성으로 본다. 더군다나 곤충으로서 대단히 짧은 수명은 나쁜-태생의 속성으로 고려되며, 덧없는 허약함이란 실제적 속성은 하루살이의 평가에서 증명적인 역할로 작용하여, 긍정적인 미적인 속성으로 변형된다는 것이 말라방드의 설명이다. 디자이너가 무언가를 디자인할 때 지적인 경험은 훌륭한 디자인을 위한 미적 속성의 바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루살이의 경험적 개념에서 미약한 불완벽성에도 불구하고, 하루살이를 목적적으로 지각하여 하루살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더욱 분발하게 되는 이치이다. 하루살이에 대한 두꺼운 개념적 내용은 어느 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성은 미적 평가에 긍정적 기여를 제공한다. 하루살이가 아름다운 것은, 바스러질 것 같은 미적 속성이 취약한 실제적 속성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말라방드의 주장에는 명료한 두 가지 요점이 있다. 우선, “나약한 곤충이라는 하루살이의 특별한 개념적 내용을 경험으로 갖게 될 때 현재에 바라보는 지각적인 요소들은 구조화되어 적절한 쾌의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적절한 경험은 단순히 도구적 가치를 포함하는 개념적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각적인 요소들의 구조에 입각해서 쾌락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들에 대해 개념적으로 얇은 경험을 하면서 쾌에 반응하도록 경향 지어진 존재들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나날이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어느 면 완벽한 전문가로 살아가는, 그래서 부용미의 판단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들임을 믿는다.
4-2. 목적론적 스타일로서 기능
거여, 윅스, 알리선, 말라방드의 의견을 총합해보면 부용미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명확한 판단이어야 한다. 2. 개념적으로 두터운 판단이어야 한다. 3. 두터운 판단은 완벽성과 더불어 그 목적을 대상의 성공에 기여하는 긍정적 상으로 지시되어야 한다. 4. 여하간 이런 판단은 무관심적 쾌를 낳는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 안에서 참여하도록 허용한다.
이런 해석은 우선 거여의 논점에서 기인한다. 거여에게 있어서 목적이나 기능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형식으로 한정한다. 파슨(Parson)과 카슨(Carlson)은 거여가 뜻하는 기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구성 요소들이 미적 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 이상으로, … 우리가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는 형식적 요소들이 쾌의 발생을 구속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부용미가 목적을 수행하는 완벽성의 방식으로 인한다면 부용미의 건전한 설명으로 불충분해 보인다. 그로써 하나의 대상이 목적을 수행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이 아름답다고 볼 수 없는 해석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자전거는 자전거가 되기 위한 요구사항들이 있다. 그것은 2개의 바퀴와 페달, 하나의 시트가 있고, 핸들이 있다. 만약 자전거가 이런 것들 중의 하나라도 결손 한다면 불충분한 자전거의 사례가 되거나 혹은 전혀 자전거가 될 수 없다. 이처럼, 어떤 대상의 목적에서 완벽성은 아름다운 사물을 발견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요인이다. 두 번째, 만약 하나의 대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이런 방식들은 그 대상에 대한 종합적 평가의 부분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앤드루 리치의 ‘브룸튼’ 접이식 자전거(1983)는 무게를 줄이고 접는 과정을 간소화 하여 휴대용 자전거의 가치를 예시하지만, 그 성능과 상관없이 안락한가? 혹은 주행할 때 견고한가? 혹은 더 경제적 비용이 드는가? 등 거여가 말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 휴대용은 한 가지 방식으로서 종합적 평가의 일부라는 것이다. 거여는 형식적 요소들로 목적에 따른 완벽성의 개념에 접근하는 자유로운 유희의 능력을 설명함으로써 두 번째 중요점(두터운 개념)을 만들어 주었다. 거여가 말하는 요점은, 완벽성은 우리가 수행하고자 하는 바 하나의 사용일 필요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당면한 디자인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기능과 사용성을 혼돈해 왔으며, 다른 한편 윤리적인 선, 즉 완벽성과 기능을 일치시키며 디자인의 목적으로 일궈왔다는 사실이다. 디자인은 기능과 관계한 완벽성, 즉 윤리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지 사용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편 스티브 번스(Steve Burns)는 부용미에 대한 설명을 다른 각도로 예시하는데, 부용미가 형식을 통해서 기능만을 강조한다면 한 면만을 편파적으로 기대하는 것으로 본다. 때문에 비 기능적 형식으로 인하여 부용미에 어떤 긍정적인 평가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내가 십대였을 때 우리 가족은 스튜드베이커(Studebakers) 시리즈를 소장하였다는 데서 특별한 자부심을 가졌다. 1958년 스튜드베이커에는 유명한 파리의 산업 디자이너 레이몽드 로위가 장관 을 띄는 비 기능적 수직 안정판 지느러미(fin)를 디자인하여 부착하였다. 로위는 수직 안정판을 명료한 예각 삼각형으로 디자인하여 단순한 상자모양으로 보이게 제품에 반영시켰다. 그 차는 수 직 안정판을 가져서 엣셀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포드, 쉐비, 캐딜락처럼 고전으로 자리매김 하 고 있다.
번스는 디자인된 대상에서 비-기능적 형식들도 미의 판단에 기여한다고 본다. 스튜드베이커는 수직 안정판이 없이도 자동차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나 수직 안정판은 자동차 디자인으로 인정하는 허가에 통합되었다. 이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의 섬세함이 교회에 대한 부용미의 판단에 통합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번스가 고심하여 내린 2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대상의 목적에 대한 본질적 요소들로부터 장식을 분리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장식은 부용미(자유미와 상관이 있다)에 대한 판단과 관계가 없다. 두 번째는, 장식을 대상의 총합적인 미적 장점의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시도이다. 이는 스튜드베이커가 수직 안정판 같은 비본질적인 지느러미 장식으로 인해서 부용미의 관점에서 불만족스럽지만, 부용미는 대상의 형식적인 속성들로부터 유래하는 만큼 부용미의 판단에서 효용성과 장식미라는 두 개의 타입들로 분리시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스튜드베이커를 쉐비 위에 두는 만큼 장점을 지닌 것으로 본다. 이로써 부용미의 판단에서 수직 안정판은 그 차에 대한 우리의 승인에 배제되지 않았다. 두 번째 주장은, 대상의 평가에서 비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상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차에서 수직 안정판은 부용미와 별 상관없는 장식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초점으로 모아질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대상의 기능을 미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의 스타일을 고려함으로써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을 평가할 수도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부용미에 대한 최종적으로 완벽한 설명으로 아름다움의 근원으로서 목적성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는 형식적인 해석, 앞에서 기술한 거여의 소극적 관점을 수용하여 무마해준다. 부용미에 대한 이해는, 형식(자유미)에 기능성(부용미)을 포함시켜 통합적으로 평가한다. 윅스는 논문에서 이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부용미와 관련하여 대상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가운데 평가하는 것은 “완벽성은 대상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연성(contingency)의 방식으로 대상의 목적을 깨닫게 해준다.” 윅스는 부용미로 대상을 평가할 때 ‘목적론적(teleological)’이거나 ‘기능적’인 양식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윅스에게 있어서 대상의 목적은 실현화의 완벽성에 둔다. 그리하여 거여의 방식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윅스는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한층 우연적이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는 목적을 의식하였다. 그러니까 스튜드베이커에서 수직 안정판은 “우리가 대상의 목적을 깨닫는 형식인 한에서 우연성을 반영함으로써 목적론적 스타일에 대안적 의미를 준다.”고 밝히고 있다.
사례로 예시한 1958년 스튜드베이커의 수직 안정판은 하나의 독특한 방식으로 대상을 창조하기 위한 디자인 결정의 산물이었다. 수직 안정판은 쉐비나 캐딜락처럼, 그것의 기능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직 안정판은 색다르게 주어진 기능의 방식으로 스튜드베이커에 기여함으로써 미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독특하게 제작된 차의 부분이 되었다. 목적에 입각한 자동차의 스타일은 대상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자유미의 형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용미에서 오는 쾌도 ‘대상의 목적과의 관계에서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무관심적 혹은 무목적인 합목적성이 아니다. ‘목적있는 합목적성’도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와 함께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의 정도에 따라 부용미에 대한 판단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점이다. 대상의 부용미에서 우리가 느끼는 쾌는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에 기초하지만,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유희의 방식은, 대상의 목적에 대한 견지에서 대상의 실제적 체계적 구조의 우연성이 조명되는 것이다. 가령 누워서 가는 자전거는 곧추선 일반 자전거와 다르게 목적을 실행한다는 방식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 이런 개념의 장점은, 하나의 대상에서 형식적 요소들만큼 기능적 요소들에 대한 주목이 적용된다. 그리고 그 점은, 형식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대상의 완벽성이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것으로 의식하게 한다. 윅스는 목적론적 양식(teleological style)에 대한 평가는 취미의 순수한 판단보다는 불순한 판단, 즉 인지력을 강조한 자유로운 유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조심스레 기록하고 있다.
그는 부용미의 판단에서 “대상의 목적에 따라 적합하게 실현하려는 수많은 상상력이 결정적 단계에서 형식의 우연성으로 채택되며”, 이는 “상상력의 대안적 유희에서 오는 바, 목적론적 양식으로 부용미를 반성하는 쾌를 준다.”고 적고 있다. 윅스는 주어진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한정된’ 방식은 없다고 본다. 어떤 대상의 목적은 교회나 자전거와 같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라서 디자이너는 모든 우연적 세부성을 결정할 수 없어서, 디자이너의 판단들이 고정되고 인지화 되는 것으로부터 막아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용미에서 주어진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많은 방식들에서 한정된 유희는 없으니, 알퐁소 비알레티(Alfonso Bialetti)가 ‘모카 익스프레스 주전자(1933)’을 디자인할 때 궂이 원추형을 사용하지 않고 팔각형을 택한 것도 우연한 양식일 수 있다. 우리는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때 “우연성의 특별한 방식”에서 합목적성을 깨닫고, 그에 따라 평가를 한다.
칸트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은(§10, 33) 대상의 합목적성과 더불어 지성도 미적인 판단의 자유로운 유희의 부분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대상의 목적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유사하거나 차이가 있는 다른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윅스는, 이런 지식은 “풍부한 경험의 배경에서 오는 명료함 뿐만 아니라 풍부한 비교를 지성적으로 조직화하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완벽한 자전거의 조건을 판단해야 한다면 과거에 가졌었던 다른 훌륭하지 않은 자전거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경험에 입각해서 판단을 진행해 가는 것이다. 윅스의 설명은, 미에 대한 칸트의 분석과 방법 속에서 부용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주었다. 부용미는 우리의 평가에서 전제된 ‘개념적 지식의 어떤 총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지식은 우리의 능력과 정보의 자유로운 유희에서 직접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윅스가 알려주듯이, 우리가 한 대상의 형식과 기능을 볼 때 대상의 형식을 즐기는 만큼 미적으로 기능의 특별성(the specifics)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 승인은 충분히 통합된 형식과 기능을 발견하였을 때 오는 것이다. 윅스의 설명은 부용미에 대한 거여의 소극적 개념을 통합하고 있다. 왜냐하면 (a) 대상의 일반적 기능은 우리의 평가 안에서 전제되며(우리는 어떤 자전거의 현재를 알고 있으며, 또 그 자전거가 가정하는 바를 안다); 그리고 (b) 이런 기능과 혹은 목적은 우리의 평가를 한계 지어주는 성질로, 만약 기능이 잘못 수행되면 우리의 미적인 평가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칸트의 취미판단에서 우리가 윅스의 설명을 염두 한다면 자유미에 대한 판단이 일어날 수 있는 기준은 늘 현재라는 공시적(synchronic) 국면을 갖는다. 예를 들면 ‘무관심적 쾌’와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이다. 부용미의 판단들도 또한 공시적 국면이 있어서 이런 특성들을 공유하는 데, 즉 ‘목적에 따른 개념의 전제’이다. 그러나 부용미의 판단들은 그 이상의 통시적(diachronic) 국면이 있어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부용미에 대한 판단이 변할 것을 안다: 우리는 앞에 있는 어떤 대상이 스스로의 목적을 수행하는 바를 상상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대상은 잘 디자인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과거에 우리가 알았던 사용과 가치에 의존할 것이다. 여기에서 부용미에 대한 판단은,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디자인들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디자인 제품들은 스스로의 목적을 완벽에 가깝게 성취하여 매우 잘 수행할 때 한층 밀접한 집중력을 야기하는 방식에 있다.
부용미는 디자인에서 ‘미적인 것’의 위치선정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 제품의 기능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디자인 외관을 순수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입어보고, 다루어보고, 사용하고, 그것을 활동적으로 개입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입은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차이가 있는 질적인 디자인에 대한 미적 경험이 될 것이다. 부용미를 통한 디자인 미학은 <표1>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자유미 부용미 | |
1. 개념 |
목적없는 합목적성 목적있는 합목적성 |
2. 심의 상태 |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
3. 미의 특성 |
자유미 자유미 + 부용미 |
4. 판단력 |
아름다움 아름다움 + 완벽성(선, 기능) |
5. 인지력 |
순수한 취미판단; 공시적 순수하고, 불순한 취미판단; 공시, 통시적 |
6. 목적성 |
무관심 목적론적 스타일로서 우연성의 방식 |
5. 결론
본 논문은, 디자인에 대한 미적 반응을 끌어내는 형식은 부용미의 판단이라는 전제하에 작성하였다. 디자인이 보여주는 미적인 현상에서 우리가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 조정하는 방식에 있다. 그 방식은 관념적이기 보다는 경험의 문제이다. 우리는 나날이 일상의 대상과 경험을 축적해 가는 어느 면 대상의 전문가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몇 해 전, 또는 그 이전보다 더 나은 지식으로 대상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부용미를 통한 디자인 미학」은 ‘목적 있는 합목적성’의 원리가 적용된 디자인의 형식을 판단하는데 있다. 따라서 목적이나 합목적성은 하나의 사물이 가져야 하는 바 아프리오리한 개념적 원인이자 내용으로 말한다. 그리고 목적 있는 전제는 주체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오는 인과성을 말한다. 이는 사물의 사용자가 사물의 기능을 주체의 입장에서 유용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사물의 속성으로 인한 욕망, 그리고 필요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부용미는 자유미의 순수한 단층판단과 부용미 자체의 개념의 총계를 가진 불순한 복합판단으로 의미하는 바, 디자인의 판단에서 자유미의 원리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자유미나 부용미는 대상의 속성이 아닌 대상에 대한 표상에서 주체자가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의 인식력으로 판단하는 데 있다. 따라서 같은 대상을 놓고도 전문가가 보는 시각과 비전문가가 보는 시각에 따라 부용미냐 혹은 자유미냐로 판단이 갈려지고, 또 한 대상을 두고서 시간적인 흐름에 따른 주체자의 경험에 차이가 나는 만큼 부용미의 판단이 깊어질 수 있다. 그리고 디자인 된 대상은 시간적 추이에 따라 그 기능이 업그레이드 되거나 또는 혁신이 나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부용미의 판단은 통시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자유미는 개념적 내용이 없는 패턴이나 얼룩달룩한 무늬, 하나의 꽃, 조가비, 새처럼 현재에 일관하는 공시적인 측면이 있다. 따라서 자유미는 하나의 형식적인 미, 부용미는 개념적 목적으로 인해서 디자인에서는 아름다움과 기능의 완벽성이라는 두 개의 구조로 유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능의 완벽성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이이지만, 비기능적인 양식 이른바 하나의 장식, 어느 면에서 자유미도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평가의 대상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목적론적 양식’으로 표현하면서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의 대안으로서 우연성의 양식도 훌륭한 미학적 견해로 밝혔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에 따라 디자인 제품을 사용하는 전문가이다. 디자인의 취미판단에서 최종적인 중재인이나 이상적인 비평가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의 범위나 경험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순수미술처럼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은 입어보고, 다루어 보고, 사용하고, 활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런 개입은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차이가 있는 질적인 디자인에 대한 미적 경험이 될 것이다. 디자인은 나날이 사용하는 익숙함의 정도에 따라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디자인에 부용미를 적용한 디자인 미학은 그 체계와 확산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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