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논문 - 디자인 미학

K. Harries의 월간미술 기고

박연실 2020. 4. 28. 08:44

헤히스의 국내저서

 

아래 글은 예일대 칼스턴 해리스 교수가 2000년 월간미술에 기고한 글이다. 독자들에게 현대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글이 될 것이다.

칼스턴 해리스 교수는 국내에서는 '현대 미술, 그 철학적 의미'(서광사)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책의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현대 미술에 대해 인문학적 견지에서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겐 내가
강권하는 책이다. 나 또한 이 책 이후로 현대 미술에 대한 뚜렷한 시각이 생겼을 정도이니까.

 

현대미술
K. 해리스 저/오병남,최연희 공역



월간미술 2000.2 특별기고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본지에서는 지난 호에 미술계의 주요 담론인 ‘예술의 죽음’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의견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는 예일대에서 예술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해리스의 글을 통해 21세기 세계 예술을 예견해본다. 현대 예술의 범주와 역할을 헤겔, 하이데거, 단토의 미학적 논의로부터 이끌어내는 그는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을 새 천년의 예술적 지표로 설정하고 있다.



예술의 죽음에 대한 소고
- 칼스턴 해리스(Karsten Harries, 예일대 교수 Brooks and Suzanne Ragen Professor of Philosophy)



수의 신비(mysticism)는 지금까지 나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이 다가오면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혹시 내가 세기가 넘어가는 그 순간에 잠들어 인류가 세 번째로 맞이하는 밀레니엄을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게 되지나 않을까였다. 인류 전체가 흥분하는 그 시간대에, 폭죽과 흥분이 나의 주위에서 역력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세기가 교차하는 그 순간에 만에 하나 잠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조금은 무책임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의 문화 전체를 바꾸거나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 진행과정에서, 연도를 쓰는 자리에 0이 세 개나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우리들이 진정으로 가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또는 무작정 무언가에 이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앞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할 때다.

나는 작가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예술 역시 문화의 다른 측면들과 같이 그 형태가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위협적일 정도의 힘찬 진행과정에 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가끔은 우리들에게, 과연 이 모든 프로세스가 끝났을 때 그 결과물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더 단토(Arthur Danto)는 이러한 이유에서 ‘예술의 종말(End of Art)’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또 자칭 예술이라고 하는 여러 부류의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현재 세계의 미술시장이 호황을 거듭하며 번창하고 있을 때 예술의 종말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번창하고 있는 오늘날 미술세계의 지표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미술의 단면도들이 그 종말을 예고하거나, 벌써 죽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토는 현재 평론가로서 활동하며, 유동적인 미술시장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도 미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는 헤겔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겔 역시 미술의 종말론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과 단토의 이론은 비교해볼 만하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헤겔의 세 가지 입장을 밝히고 있다.
a. 예술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진리라는 이름하에 형상을 가진 가장 높은 형식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b. 혹자는 예술이 계속 발전하고 완벽한 형태를 취하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이 애타게 찾는 것이 아닐 것이다.
c.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예술은 우리들에게 그 역할이 주는 의미에 한해서 과거의 것으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 헤겔이 이 말을 한 것은 1820년대의 일이다. 그 이후에도 많은 컬렉터들을 만족시켜주었던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말이 근거 없는 이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볼 만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술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역할을 충족시켜주는 예술이 있다고 하다면 과연 그것은 우리들에게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헤겔의 이론은 19세기 초반에 씌여진 것이고 단토가 자신의 예술 종말론에 대해서 생각을 펼친 것은 20세기의 예술 전반을 관찰한 후였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예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말은 했지만 서로 다른 이해 속에서 그 이론을 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현재 우리의 생각에 가장 큰 도전장을 내는 것은, 현재의 예술시장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전보다 더 생동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다.

예술시장은 다른 어떤 때보다 현대에 와서 번성하면서 거대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론과 이렇게 번창하는 예술시장의 거대한 사업들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캐묻는다면 현재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말할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술이 죽었다’는 것은 현재의 예술시장의 단면도를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지금 세기를 이끌고 나가고 있는 화랑들이 내보이는 예술 형태들은 우리에게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뒤에 버려둔채 전진하고 있는 것 같은 의구심을 갖게한다. 단토는 현재 미술시장에 놓인 ‘거대한 먹구름’ 에 대해서 말을 한다. 이는 예술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 “과연 예술이 미래가 있을까” 와 같은 비관주의가 퍼져 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시대의 폴록과 로드코, 그리고 칸딘스키와 피카소는 가졌지만 현대 예술가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먼저 답을 해보면 칸딘스키와 피카소는 그들의 예술세계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narrative)를 완성함으로써 작품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예술 형태로 인식하게 했다. 오늘날 이러한 이야기 방식의 예술은 대부분의 현대 예술가들에 의해서 예술의 진정한 형태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과 단토가 말하였던, 예술이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헤겔은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 작품성 자체보다도 그 작품이 전해줄 수 있는 진리의 형상을 사람들이 읽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비록 하나의 물질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가 구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본 것이다. 지금과 같이 과학적인 이성이 사회 전반에 진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 때에 예술 역시 또 하나의 진리의 형상이라는 말을 할 여력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 않다. 헤겔이 예술의 가장 높은 가치로 간주했던 ‘예술의 죽음’은 단토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죽었음을 알리는 전주곡(presupposition)이 되었다.

‘예술은 죽은 것’이라는 생각의 시초는, 예술가들이 철학적인 사고의 바탕 위에서 예술의 정수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것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단토는 여기에서 포스트 모던 예술의 개념을 처음 시작했던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오늘도 여러 형태의 작품들이 제작되면서 예술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있으며 또한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들 내에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캐묻고 있다. 현대 예술은 가끔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면서 ‘미’ 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며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예술이 이제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미학적인 오브제로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은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단토는 워홀이 제작했던 브릴로 박스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브릴로 박스는 추상회화를 추구했던 스티브 하비라는 작가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것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그 진짜 제품보다 올덴버그나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들과 더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단토가 지적하는 이 두 개, 즉 우리가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브릴로 박스와 작품안에 있는 브릴로 박스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이것을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단토가 지적하였던, “왜 상점에 있는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워홀이 만든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고 불리는가”에 대해 더이상 예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사고가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들은 또한 헤겔과 같이 진정한 예술은 정신과 영혼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토의 이론과 맞지 않게 된다. 물질 속에서 정신은 느껴져야 한다. 위대한 예술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문점은, 어떻게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호소하여 하나의 정신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궁금증을 자극한데서 시작한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품들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예술을 이해하게 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관객들이 그 작품을 작가 아이디어의 한 도면으로만 인식하게 되어 그 예술작품은 언젠가 버려질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하의 작품 대부분은 이렇게 하나의 이슈가 아이디어가 되어서 기호화된 것이다. 성과 인종, 건강, 그리고 테크놀러지 등의 이슈들을 내걸고 세계를 자극하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은 그 의미가 가벼워졌다. 작품들은 생각의 이미지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예술이 이렇게 작가의 생각과 이론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적인 도구가 되었을 때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예술은 물질 안에서의 의미의 화신이 되어야 함을 가정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손실 없이 다른 표현방법에 의해 해석될 수 없는 의미다.

단토는 뒤샹과 워홀이 - 그리고 현대의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 철학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해시켜준다. 이렇게 예술을 ‘철학적인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곧 하나의 역사가 단락될 것을 말한다. 예술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하는 객관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이론을 예술이 아닌 다른 측면을 설명할 때 펼치기도 하였다. 즉, 영혼에 대해서다.

헤겔은 정신적인 세계는 그 발전과정에서 감각적인 것과 예술의 영역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 현대인들은, 이보다 진화가 덜 되었던 문명보다도 예술의 필요성을 더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헤겔이 예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말을 했을 때에는, 이른바 발달하는 정신세계의 단면과 연관지어서 설명 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예술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죽어 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다만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일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은 현대의 예술을 심사숙고하면서도 과연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러한 예술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는 단토의 이론 속에서, 우리들은 죽음 뒤에 승화된 새로운 예술형태, 즉 헤겔이 밝힌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에 대해서 가능성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예술을 다시 이해한다. 즉 “진리가 그 형상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식”으로. 하이데거는 이렇게 예술이 참된 존재로 남겨지기를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사회 형태, 즉 이성적인 사고,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이데거 역시 헤겔이 밝혔듯이 사람들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하며, 그 전환점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물질을 통한 정신적인 승화를 줄 때, 그 경험을 통하여 진리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겔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극단적인 이론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이성 쪽에 서 있었다. 즉, 헤겔은 예술이 죽음으로써 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로 승화된 정신성이 재현될 것이며 인간이 발전하는 데 정신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단토 역시 이 이론을 따르고 있다. 단토는 현대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단토가 어둡고 신화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리처드 바그너의 전통을 따르고, 헤겔의 분명한 논리를 가지면서 계몽적인 사고방식과 이성적 힘을 소유한 작가 안젤름 키퍼에 대해서 말하며 그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하이데거 : 키퍼 = 헤겔 : 워홀’ 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키퍼를 저버릴 준비가 안되어 있다.

나의 최근 저서 《건축의 윤리적인 기능에 대하여》에서 나는 물질이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의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책에서 나는 ‘물질의 리얼리즘’ 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즉, 건물들이 유리?콘크리트, 그리고 돌과 벽돌 및 나무들로 지어지지만 건물의 완성된 형태 속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로 새로 태어나며 그 물질들이 시각적으로 의미를 지원해 줄 때, 다양한 물질들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결코 의미가 물질을 완전히 떠난 것이라는 이해는 피해야 한다.

이러한 예술 형태와 건축물은 물질 속에서 같이 공존하는 의미를 더 나타내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헤겔과 단토를 반박하며 하이데거의 이론에 동감하게 된다. 나는 물질에 대한 진정한 탐구 안에서 의미있는 진수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세계의 실제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나의 첫 저서인 《현대예술의 의미》로 시각을 돌리게 한다. 나는 그 책에서 당시 프랭크 스텔라에 의하여 대표되었던 미적 이론을 반박하였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내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의미들을 직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실주의, 즉 ‘새로운 사실주의’ 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며 결론을 내린바 있다.

스텔라는 당시 다른 현대의 작가들과 함께 현재성을 강조한 예술을 하였었다. “나의 작품들에서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은, 그리고 내가 내 작품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대했을 때 혼돈스러운 잡음없이 바로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당신의 앞에 놓인 것을 보는 것이 바로 당신이 얻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 곧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지 다른 이중적인 의미나 그 너머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없애버리자는 사고였다.

즉, 예술은 더 이상 하나의 암시적인 의미를 표현하거나 수수께끼가 되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물질’은 ‘정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미술품은 의미를 버린 채 다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 자체의 존재성을 위하여 작가는 의미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물질주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물질주의는 의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이렇게 의미를 찾으려 하다가는 그 물질의 현존적인 의미가 가려질 수 있다는 이론도 나올 수 있다. 가령 글자가 인쇄된 한 장의 인쇄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신이 매일 읽는 신문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 심취되어 당신은 그 문자들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도 잊고 있을 것이다. 문자들은 이렇듯 물질로서 올바르게 작용하였을 때에 투명한 물질이 되어 그것이 처음에 하려고 하였던 역할을 완수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문자들을 통과하여 그것들이 주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문자들은 카메라나 혹은 작가들에 의해서 크게 키워지기도 한다. 그것들은 처음에 맡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브루수 나우먼이 작업에 사용했던 것같이 AH HA 라는 문자들로 재현되기도 한다.

작가의 손에 의해서 한때 의미가 충분하였던 문자들은 문자 그 자체가 하나의 물체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었을 때는 반전이 일어난다. 문자들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사람들이 보통 놀랐을 때에 드러내는 단순한 표현이 갑자기 부풀려져 소리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침묵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끝없는 대화들은 곧 침묵을 덮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나우먼의 작품을 화랑에서 본다면 그들은 쉽게 그곳에 의미를 부여해버릴 것이다. 그것을 현대예술의 한 측면으로 이해하고 아우라를 통하여 신성함을 나타내줄 수 있는 추상회화로 판정할 것이다. 어떻게 벤야민과 보들리에를 읽으면서 성장한 현대 평론가가 현존에 대한 찬미를 할 수 있을까?

나우먼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우라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한다. 나우먼은 말레비치가 그의 신비로운 작품 〈아하 - 체험(Aha-Erlebnis)〉을 통하여 추구한 바 있던, 즉 거의 아무런 형상도 그려지지 않는 캔버스의 침묵이 줄 수 있는 의미를 관객들이 그 빈 공간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우먼의 ‘AH HA’ 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말레비치의 의문점을 더 심도있게 경험하게 해준다.

나는 이 상황에서 아주 자신만만한 관객이 자신있게 “Aha!” 하면서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임금님은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추상회화의 흐름으로 간주함에 따라 나우먼의 작품은 존 발데사리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2차원의 화면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크 로센탈은 나우먼의 그 작품을 〈순수 추상 비판전〉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다른 점에 착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발데사리의 작품 제목이 도리어 그의 작품을 더 실감나게 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그 검은 마크들은 하얀 캔버스의 침묵을 깨고 있다. 말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그 제목은 우리들을 점점 더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들은 그 검은 마크들에 쏠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작품에 있어서 의미를 모두 버리게 한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하고 의미없는 작품을 우리들로 하여금 보게 하듯이. 여기에서 물질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은 도리어 더 분명해져야 하는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텔라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현전에 대한 모더니스트들의 찬미는 “작품은 존재하는 정신성의 현존”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들의 이론과 대비된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의미와 물질의 관계를 엮어주지는 못한다. 이렇게 불분명한 관계는 도리어 우리들에게 의미를 줄 수 없는 물질들, 그러나 종국에는 의미를 완전히 저버리게 하는, 즉 의미가 있음에도 의미를 보지못하게 하는 물질들을 남겨준다.

이렇게 분리된 의미와 물질 사이의 공백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 분석 방법을 필요로 한다. 의미가 계속 발견되려면 의미는 물질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물질은 그 안에 의미를 가득 담고 있어야 한다. 그 둘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될 때까지. 현대에 들어와서 얼마나 많은 물질 안에서 새로 승화되는 의미에 대한 논란이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지금 행해지고 있는 자연과 물질에 대한 연구와도 흡사한 것이다. 이 연구 안에서 물질은 그 순위에서 뒤로 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이론들이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에게는 예술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이성이 지어 놓은 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창문이 필요하다. 창문을 열어서 우리들을 초월적인 세계로 인도해줄 예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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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Karsten Harries

“인간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이어야 ”

당신은 헤겔과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두고,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술의 역할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물질에 대한 진정한 탐구”는, 곧 테크놀러지의 본질은 인간의 도움없이 그 자신의 변화를 이끌 수도 없고 또 인간적으로 극복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예술과 철학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쟁점은 테크놀러지 전반에 대한 사회적 이해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는 테크놀러지 가능 영역이 갖는 힘과 그 한계를 인지하는 일이다. 테크놀러지가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과학의 여러 영역을 빠른 시일 내에 분석하여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찍이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테크놀러지가 우리들의 삶을 위협할 때에는 그 합법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과학 그 자체의 지적 능력에는 가치라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테크놀러지가 사회내에서 좀 더 확대된다면 우리를 니힐리즘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런 사실로 우리들은 테크놀러지가 가치를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자율적 인격체로 승격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과 동일한 지능을 가진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이런 노력의 무모함을 지적하는 논변 또한 제출되고 있다.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테크놀러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공적인 지적 능력과 인간의 지적 능력 사이에는 도저히 연관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나보다 인간 뇌의 구조를 더 잘 아는 학자들은 이렇듯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불확실성 이론’이 적용될 수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마이크로 스케일의 작업을 컴퓨터가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과 기계가 가질 수 있는 이러한 지적 능력에 대한 차이점이 끝까지 넘어서면 안되는 벽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이 테크놀러지의 한계점을 밝혀주는 가운데 인간 존위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예술의 주된 흐름이라 할 수 있는 ‘테크놀러지 아트’를 둘러싼 논의는 문화적 맥락에서 복합적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역시 테크놀러지 아트가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사실에는 동감한다. 테크놀러지 아트가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매혹적인 힘에 반하겠지만, 또한 그것이 주는 한계에도 싫증을 느끼리라 예견된다. 현실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들이 없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와 함께 이 모든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도 더 깊어질 것이다. 테크놀러지 미디어 아트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시도한다. 그 주요 수단은 디지털 시스템일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시스템과 다르게
제공하는 예술적 소통체계의 변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뉴미디어 테크놀러지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도구(tool chara - cter)라는 생각은 이러한 부류의 예술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강해질 것이다. 즉, 테크놀러지 예술은 자신만의 강하고 자유로운 힘을 발휘하는 과정 속에서 ‘빈곤함’또한 눈에 띄게 될 것임을 예견한다. 이런 진행과정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한다는 탈출구로 다시 의미를 찾을 것이다. 본문에서 말했듯이, 인간을 초월적인 세계로 인도해줄 창문은 열려야 한다.

이미 마샬 멕루한은 구텐베르그식 활자문화의 종언을 선언하지 않았는가. 이른바 멀티미디어 시대에 예술가에게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는 예술 창작의 개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한때 구텐베르그의 프린팅 프레스가 예술의 전통적인 개념을 깨버렸다고 말했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자혁명도 마찬가지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본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 현실은 점점 더 우리들에게 현실 그 자체보다 더 다가온다. 이런 위협 속에서 예술이 한번 더 현실의 진정한 의미, 즉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줄 것이라고나는 믿고 있다. 가상은 가상으로밖에 끝날 수 없다. 가상 음식은 우리들에게 어디까지나 먹을 수 없는 음식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 자연과 인간의 합일, 인간과 기계 혹은 예술과 테크놀러지의 조화는 21세기의 주요 관심사다. 이에 따라 이미 하이데거의 관심사였던 ‘진리를 밝히는 예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 같은데 …

뉴 테크놀러지 아트가 나타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예술의 형태들을 마치 과거의 것으로 간주하며 그 생명력마저 없어질 것이라고 예견들을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런 위협은 전에도 있었다. 프린팅 프레스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그랬고,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에도 예술은 마치 커다란 위협을 받은 것만 같았다. 이제 프린팅 프레스와 사진의 자리에 컴퓨터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이렇게 예술의 형태가 완전히 변형될 것이라고 위협받을 때마다 예술은 다만 그 기능의 일부를 잃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본문에서 밝혔듯이, 물질 내에서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공한 예술작품은 흡사 사람의 얼굴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구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을 과연 테크놀러지 아트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궁금하다. 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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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 1937년 출생. 예일대학 박사학위(Ph.D) 취득(1962년). 주요 저서로는 《Ba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n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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